1529년 10월 1일~4일 -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총회

“교회가 여러분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그리스도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제발 신자들의 안위를 바라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문제를 다뤄주시고 세상이 과연 성령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 주십시오.”

 

   
▲ 마르부르크 회담 조약서에 표기된 서명들. 취리히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을 축소한 것으로서, 스위스 대표들의 이름이 먼저 표기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사제(司祭, priest)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린 제사를 매일 매일 드리는 제사로 행했던 일을 배격했다. 특정 사제가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고 모든 신자들이 드리는 만인 제사장론을 가르쳤다. 신자들이 저마다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신 그리스에게 직접 나아가 기도와 찬미와 중보기도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만인 제사장론이다.

또한 개혁자들은 미사의 제사와 화체설을 배격하고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잔을 나누어 주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사들 위에 높이는 데도 일치한 행동을 했다. 또한 성사의 숫자를 줄였다.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사 중 단 두 가지인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께서는 보편적 가치로 보셨다고 주장했다.

1. 종교개혁의 위기
그러나 바로 여기 성사 부분에서 개혁자들 간에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 교회의 성례에 대해서 얼마나 멀리 떠날 수 있느냐가 개혁자들의 차이점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성례를 더 중시했다. 세례를 베풀 때 중생이 발생하고, 세례를 베풀 때 귀신을 쫓는 의식을 거행해야 하며 그리고 성찬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하신다는 교리를 주장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성례들을 교회의 본질적 표준으로 삼았다. 루터의 요리문답은 성례에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대등한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후대에는 견신례를 유아세례의 보완책으로 준 성례의 지위로 회복시켰다.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례들을 성령께서 내면적으로 전달하는 은혜의 인과표로 의미를 축소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요 3:8) 임의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유하게 은사들을 전달하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방법들에 매여있다.

스위스 종교개혁자들 역시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그 목적이 성례를 통하여 유익을 얻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성례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있었다. 재세례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유아세례 받는 자가 믿음을 표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재세례파는 또 퀘이커 교도들의 선구자들인데 퀘이커는 성령의 형식을 아예 폐지하고 성례들이 상징하는 중생과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영적 사실들만 받아들였다. 퀘이커는 형식을 정신과 대체하는 것을 배격했으며 필요한 것은 형식 없이도 정신이 살아남을 수 있으나 반대로 정신이 없다면 형식도 죽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다.

2. 두 영웅의 대결
이처럼 16세기 초 등장한 개혁자들의 교회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이 다른 점에 대하여 고심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성찬 논쟁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승부사가 둘 있었다.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 취리히의 쯔빙글리였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지역에서 획득한 명망도 비슷했고, 나이도 루터가 쯔빙글리보다 일주일 더 많은 정도의 동갑내기였다. 그들은 각기 저술의 능력도 비슷했다. 쯔빙글리와 루터 진영에서는 각기 상징설과 루터의 변체설은 차츰 충돌의 도가 심해졌다.

성찬 논쟁이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타격으로 나타난 것은 가톨릭의 공격이 이유였다. 비상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비상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작센의 선제후와 헤세의 영주가 슈파이어에서 만나 뉘른베르크, 울룸, 슈트라스부르크, 장크트갈렌과 더불어 상호 보호를 보장하는 ‘비밀 합의’를 체결했다(1529년 4월 22일). 슈트라스부르크와 장크트갈렌은 성찬논쟁에서 취리히 편을 들었다. 그러니 일의 진전을 지켜본 루터는 그의 개혁 동반자인 멜랑히톤에게 쯔빙글리를 지지할 수 없음에 대해 생각을 맞추고 쯔빙글리와의 동맹을 거부했다.

개혁자들의 영주는 슈파이어에서 멜랑히톤에게 개인적으로 자문을 구하고, 편지로 쯔빙글리에게 자문을 구한 뒤, 종교개혁자들에게 마르부르크에 모여달라는 공식 초대장을 보내면서 자신의 영토에서 신변안전에 이상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3. 마르부르크 영주가 회담 성사시키다
취리히는 개혁자들의 연합회의가 성사된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취리히 시장이 신변안전을 이유로 떠날 것을 반대했으나 영주의 안전통행증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떠났다. 아내에게 바젤 너머의 지역으로 간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고 여행을 시작했다.

쯔빙글리 일행은 슈트라스부르크에 11일 동안 머물면서 주일에는 설교를 했다. 9월 19일 오전 6시에 일행은 슈트라스부르크 대표들인 부처와 헤디오, 야콥 슈트름(그 도시의 시장)과 함께 5인의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헤세 지방의 접경에 도착했을 때 40명 기병대의 영접을 받았으며, 1월 27일 오후 4시 마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마르부르크 영주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과 영지 다툼은 물론 기 싸움이 진행되는 기간이기에 그들은 여행에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마르부르크에서 만난 루터는 예전의 루터가 아니었다. 그를 수행하는 비텐베르크 사람들까지 마치 황제 주의에 빠진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루터는 쯔빙글리를 비롯한 스위스 신학자들을 이단시 하였으며 그들과 회담을 한다 해서 유익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스위스 신학자들을 위험한 이단자들로 간주했기에 그들과 협상할 가치를 느끼지도 않았다. 혹시 그들이 굴복한다면 모를까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루터의 모습은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논쟁하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는 교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군분투 할 때였다. 또 부르스 의회에서 카를 5세 앞에 섰을 때, 말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던 때 황제의 은혜로 재판을 다시 열기로 했고 그 다음날 자기 환경이 바뀐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때, 지금은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그의 마르부르크에서의 모습은 황제도 같고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교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수군대는 이들이 있었다. 마르부르크의 루터는 보수주의자로서 성찬의 비적(秘籍)을 믿는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는 인물로 변해 있었다. 부르스에서 성경과 개인의 판단을 억압하는 교황과 싸우던 루터는 어디에 있는가?

엉망이었다. 겨우 1517년부터 12년 째 된 루터의 모습은 초기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회의 진행이 순조로울 이유가 없었다. 개별적인 친교의 시간에도 루터파 사람들이 오이콜람파 디우스 같은 이와는 스스럼 없이 대했으나 루터는 자기의 친구였다가 지금은 쯔빙글리 진영으로 간 부처를 만났을 때는 웃음을 지우며 악수를 한 뒤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군” 이라 했다고 역사는 기록으로 남겼다.

공식 회담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낭만적인 마르부르크 성에서 10월 첫날부터 열렸다. 이 회의는 종교개혁 이후 개혁자들의 첫 번째 회의였다.

4. 첫 번째 개혁자 회의
기독교 신교의 각 지역성을 극복하고 단일성을 획득하기 위한 최초의 회의는 마르부르크 영주의 배려로 마르부르크 회의장에서 열렸다. 세계사적인 의미의 1529년 10월 1일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의학교수 유리키우스 코르두스는 라틴어 운율로 “통렬한 루터, 점잖은 오이콜람파디우스, 도량이 넓은 쯔빙글리, 웅변가 멜랑히톤, 경건한 슈네프, 용감한 부처, 충직한 헤디오”라는 표현법으로 인사말을 했으며 마르부르크에 모인 다른 모든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게도 분열을 치유해 달라는 부탁의 말로 인사를 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여러분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그리스도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제발 신자들의 안위를 바라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문제를 다뤄주시고 세상이 과연 성령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 주십시오.”

회담이 시작되고 쯔빙글리의 인상 깊은 기도가 있었다. “저희 모든 이들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시여, 저희가 간구하오니 저희를 당신의 온유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양 진영에서 모든 오해와 시기의 구름이 걷히게 하옵소서. 맹목적인 불화와 투쟁이 끝나게 하옵소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시여, 일어나시어 저희에게 바추시옵소서. 슬프게도 저희는 서로 다툴 때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바 거룩함을 얻기 위한 노력을 너무나 자주 잃어버리나이다. 저희에게 권력이 있다고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고 거룩함을 증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회담은 10월 1일(금요일) 예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루터는 평소처럼 이신칭의 설교를 했다. 비텐베르크 개혁자들은 스위스 개혁자들에게 삼위일체와 원죄, 세례에 관해서 차례로 물었고 그 결과 그간의 오해하고 있던 상당 부분이 해소되기도 하였다.

5. 루터의 우월감이 교리조정 실패
개인적으로 쯔빙글리와는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멜랑히톤은 쯔빙글와의 성찬론 대화에서 의외로 일치된 상황으로 접근해 갔다. ‘내 몸이니라’의 해석 부분에서 오해를 풀고 특정한 신비로운 방법으로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으로 바뀐다는 부분에서도 쯔빙글리의 이론 앞에서도 수긍했다. 첫날 이후 멜랑히톤은 성례론에 있어서 계속 침묵을 지켰고 루터가 중간 중간 도움을 구체적으로 요청했을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회담은 10월 2일 대접견실에서 다시 열렸다. 루터는 떡과 포도주가 성찬식 때에 예수의 육체로 변한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루터는 쯔빙글리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10월 3일 토요일 회의는 속개되었다. 루터는 소피스트들의 논리까지 끌어들여 그의 주장을 계속했다. 신학자요 성직자인 사람들을 영주가 온 몸으로 설득하고 시간을 연장하면서 성찬론의 합의점을 찾으려고 했으나 신학적인 이해,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서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일까? 루터는 성찬론의 합의는 모두 자기와 비텐베르크 성찬론에 동의하는 길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다.

영주의 파격제안으로 회의를 일요일(주일)까지 연기해서 합의점을 찾으려고 했으나 한 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10월 4일 월요일 아침, 영주는 작센의 개혁자들과 스위스 개혁자들을 따로 불렀다. 루터와 쯔빙글리를 다시 한 번 만나도록 했다. 이들 두 사람은 이 땅에서 마지막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쯔빙글리는 울면서 루터에게 다가가서 형제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루터는 쯔빙글리의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 다릅니다.”

6. 악수도 못하고 영원히 결별한 두 영웅
쯔빙글리는 “본질적인 교리에서 일치하면 비본질적인 교리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성도의 사귐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쯔빙글리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동의하는 모든 내용에 대해서 서로간의 일치를 고백합시다. 나머지 점들은 우리가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합시다.” 그리고 또 말했다. “만약 우리가 부차적인 점들에 대한 차이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교회들 안에 결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간절한 호소에도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루터는 육체적 임재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믿음의 조항으로 여겼고 쯔빙글리가 제안한 관용의 진리와 상관없는 일로 해석했다.

루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쯔빙글리를 향하여 말했다.
“당신이 나를 형제로 여긴다니 뜻밖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교리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쯔빙글리와 스위스 개혁자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원수 사랑이라는 보편적 사랑의 대상일 수는 있다고만 말했다.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들였지만 16세기 종교개혁기 최초의 공회는 양 진영의 맹주들인 루터와 쯔빙글리가 작별시간에 손을 잡지 못했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내미는 손을 영원히 잡아보지 못했다.

* 필립샤프의 <교회사전집> 7권 독일편을 참고,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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