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5주년 좌담회 / 세대간 개혁을 논하다
조효근 목사, 이다니엘 선교사, 양승록 목사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아 세대 간에(70대, 60대, 50대) 느끼는 개혁의 필요성, 그리고 우리 교회 현실을 짚고 미래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효근 목사(들소리신문 발행인), 이다니엘 선교사(무슬림 사역 30여 년, 얼굴과 본명은 선교사역 상 비공개임), 양승록 목사(복음인 대표) 등이 함께 했다.
 

 조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창한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에 일어난 이후  1525년 7월에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6개월 전에 쯔빙글리 7제자들이 다시 세례를 받으면서 종교개혁의 재반동, 개혁사건이 일어나면서 살생이 시작됐다. 그때 장정 10만 명이 죽었는데 가족까지 하면 30만 명의 살생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제가 20살 때 그 역사기록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일으킨 개혁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생할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고통스러워하면서 지내왔다. 들소리가 허허벌판에서 혼자 이렇게 뛰어나와 하는 것도 거기서 연유한 것 같다.

다른 개혁 논리를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개혁이 아닌 살인이다. 신학이나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정리해보니 루터의 종교개혁은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교리적인 교회 관습과 전례에 따른 개혁이지 교회가 책임져야 될 사회개혁으로는 한 발짝도 못나간 것 같다. 

저는 그 좋은 시절, 한국교회 흐름과 동행을 못했다. 들소리와 저의 태생적 이유가 발생했다. 기독교가 가야 할 길이요 과제도 이런 점에서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이다니엘 선교사는 무슬림권에서 사역하기에 얼굴 공개할 수 없었다. 이름을
이다니엘 선교사는 무슬림 사역자여서 얼굴 공개할 수 없었다.

    이다니엘 선교사   

“예배자 아니고도 사역(일)은 

할 수 있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배자라는 단계 없이 

사역으로 나가 일하게 될 때다.

 사역(일)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는데, 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은 예배자의 삶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기 의지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일에

 참여자로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저는 요즘 선교역사를 공부하면서 지금까지의 선교 정의를 2천년동안 교회 내부의 일로 선교를 봤는데, 말씀하신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개혁이었고 나중에 칼빈에서 사회개혁으로 가기는 했지만 현대 성경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선교가 교회가 아닌 미시오데이(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로 정리돼 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종교개혁도 교회 안의 개혁으로 한정돼 있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영역을 너무 교회 사역으로 제한한 것 같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인데 세상 것으로 치부한 것 아닌가. 선교신학이 정립돼야 이원론적인 것이 극복이 되고 복음의 능력이 교회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양   두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상황을 보면 사회개혁을 말하기에는 너무 역량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많은 부분으로 앞서서 나가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틀에 있는 것 같다. 교회나 목회자가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아닌가. 교회 지도자는 수십 년을 내다보고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날 기독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30년 만에 돌아와서 한국교회를 보니 심각해 보였다. 과거 서구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등 제3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하고 본국에 가보니 그곳이 선교지가 되었다고 하는데 요즘 한국교회가 다시 선교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반기독교 정서인 국가에 나가서 복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전했는데 한국에 와보니 양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가 개혁을 말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종교개혁 입장에서 보면 사실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것 같다. 복음은 2천 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인데, 교회와 성도가 감격 가운데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도덕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해서 자발적으로 예수의 희생을 실천하고,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정상적 교회 모습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각자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 외의 것을 섬기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너무 빗나가버린 모습이다.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이 몸인데 그 역할을 하실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본이나 권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계시를 통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입맛에 따라 자본주의 팽창 속에서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가.

 양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씀, 굉장히 무섭고 아픈 말씀이시다. 각자가 만든 하나님을 왜 만들어서 섬기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이   한국 성직자들 모습에서 추구하는 게 물질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교회 세습문제도 그 중 하나다. ‘주님만이 우리의 전부’라는 메시지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 자체도 사회 속에서 주님처럼 희생해야 하고, 주님이 부자이시지만 가난한 자로 자처하며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런 것이 선포되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인 것 같다. 물질을 추구하는 맘몬이즘, 소유와 부 등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이 성도라면 비신자와 무엇이 다른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양   조 목사님은 오랫동안 역사 강의를 해오셨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모습이 반복적으로 있지 않았나. 


    조효근 목사   

“다른 개혁 논리를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개혁이 아닌 살인이다. 
신학이나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정리해보니 루터의 종교개혁은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교리적인
교회 관습과 전례에 따른 개혁이지
교회가 책임져야 될 사회개혁으로는 
한 발짝도 못나간 것 같다.”

 

 조   신교가 가톨릭에서 나왔는데, 루터나 칼빈 등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을 많이 몰랐다. 가톨릭이란 집에 영혼 구원의 보화가 들어있는데, 거기서 성경책 하나를 꺼내들고 온 것이 복음이라고 착각한 거 아닌가. 로마교회는 국교화 되기 전에 로마교회와 제국의 황제권이 양립됐었다. 지상권으로 황제가 교회를 지배하거나 교회권으로 주교가 황제권을 지배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두 세력은 균형을 잡으면서 로마교회가 16세기까지 발전해왔다. 그런데 16세기 루터나 칼빈은 로마교회 속에서 교황권만 가지고 나오고 황제권은 놔두고 왔다. 독일의 신구교는 이전투구 양상이었다. 서로 상대교회를 빼앗아 가톨릭을 신교로, 신교를 구교로 바꾸며 교회 뺐기를 하여 낮에는 신교, 밤에는 구교가 되는 피비린내 나는 교회 쟁탈전이 있었다. 그속에 사회성이 빠졌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아무리 미화해도 절반의 개혁밖에 아니다. 절반은 가톨릭이 가지고 있다. 제사권(예배권)은 가져왔지만 사회권(예배당 밖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그런데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보면 16세기 개혁사 보면 루터나 칼빈이 죽을 때 이런 말 안 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 아니야, 루터나 칼빈 등 어떤 개혁자가 당대에 하나님의 교회를 완전히 개혁할 수 없어. 가능한한 제2, 3의 루터, 칼빈, 낙스 등 끝없이 계속 나와 줘야 지상권과 교회권이 중심을 잡아서 이 땅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한 발짝 나가게 한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개혁은 아직도 과정이라고 지금이라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슬람 지역에서 30년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보니 그들이 선교지인지 여기가 선교지인지 하는 지적을 들었는데, 우리 현실의 한계를 돌파했으면 좋겠다.

 이   저도 한국에 와서 예상치 않게 몸이 아파 치료하느라 시간을 갖고 있으면서 한국교회 현상을 보게 됐다. 무슬림 지역 현지 사역자들이 30여 명 되는데. 거기는 정말 열심히 전도하고 그룹 만들어내고 하는데 그들과 함께 사역하면서 느낀 게 기본으로 들어가야 하는 필요성이다. 사역자들은 사역하는 것에 가치와 중점을 너무 두는 것 같다. 그것은 좀 앞뒤가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서 2/3가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그 과정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새로운 예배 시대를 여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그 예배를 여시는 메시아로서 유대인을 통해 예배 시대를 여시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지 않고 성도 개개인이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것을 위해 새로운 예배 시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측면에서 본다.

그런 면에서 예배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교회 안의 예배였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공적이든 예배든. 롬 12장 이후의 영적 삶의 예배에서는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드리는 것이 신자들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기와 힘이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거기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것 같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한정된 것이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서 가는 것이다. 예배와 사역이 혼동이 된 것 아닌가.

예배는 성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사역은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하나님의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제자훈련 한다는 유명한 교회얘기를 동기목사에게 듣곤 하는데 들어보면 심란하다. 제자훈련 최고의 가치를 두고 훈련했는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참 예배자로서 새로운 예배자로 참여토록 해야 하는데, 지식만 키워져서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 현상을 본다. 이 땅의 모든 사역은 예배자로 하여금 새 예배자로 초청하는 과정이다. 예배자로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조   요한복음 언급하셨는데, 요한복음 제4복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요한은 전도, 선교, 개혁하는 사람도 아닌 삼위일체를 자기 안에서 완성해가는 사람이다. 선문답 식 표현을 계속하자면 요한복음 2장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것이 예수인데, 그 예수가 요한도 될 수도, 우리가 될 수도 있을 때까지 복음서가 해석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해석이 한 줄도 해석이 안 되고 있다. 요한복음 주인공 예수가 모두 우리로 바뀌었을 때, 아멘 할 수 있을 때 복음의 핵심으로 가까이 간다. 요한복음 저자가 자기를 공개하지 않으면 예수의 재림사상은 열리지 않는다. 공관복음 과 달리 요한복음은 내가 그라고 하면서 거기서 자기 존재를 말한다. 거기서 복음이 출발한다. 

저는 이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요한이 말하는 주인공이 예수인데, 예수가 요한이고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획득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해석이다.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책이다. 하나님이 인물을 사용하는 때가 있다. 바울은 예수 발걸음도 제한할 수 있는 폭력을 가지고 복음을 확산시킨 도구로 쓰셨다. 바울이 아시아의 인도사상이 지중해 권으로 로마 영역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한 인물이 바울이다. 바울은 인도사상이 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급하니 원으로 못 막고 금을 긋는 선으로 막았다. 바울시대에 불교, 힌두, 조로아스터, 알렉산드리아 사상을 바울의 뚝심이 다 막은 것이다. 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철학적 장치, 교리적 장치로 막았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전하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나. 이방 세력에서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시대에 바울이 등장했다. 그 공로가 바울에게 있다.

그러나 바울 이후에는 못 막았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공부가 교회에서 비켜나갔다. 속사도시대에 이레네우스가 간신히 막았다. 잘못하면 요한복음이 이단서로 묻힐 뻔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나 교회 목사나 신자들이 해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해석하면 다 거지가 돼야 한다. 자기 생활이 없어져야 한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말씀은 이 살림 안하겠다는 거다. 이 지상에서 단 한 번 백주 대낮에 ‘네가 기다리는 그가 나다’라고 하면서 이 여인을 상대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를 회복하라는 요구가 들어있다. 지금도 사마리아가 회복되지 않았다. 사마리아 오경이 율법서인데, 우리는 사마리아 사본을 제대로 만들어서 대조해서 율법서를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의 저주, 바벨론 포로 이후에 부은 저주를 풀어줘야 한다. 유대인들이 못하면 우리라도 풀어줘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메시아라고 하신 것이나 여인을 후대하여 친구로 하여 괄목할 만한 상대로 여긴 것에서 예배는 그분이 계시는 곳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환상에 빠져 있다. 백투제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라고 하는데, 고투제루살렘(go to Jerusalem)이어야 한다. 가는 곳마다 예루살렘이어야 예루살렘이 회복된다.

나는 오늘부터 요한복음 문제가 본격 거론이 되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객담, 여담도 섞여있다. 유언일 수도 있다). 제발 아직도 복음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위선성, 무당성이 극복되길 바란다.

   양승록 목사   
“한국교회 현실은 목회자가 자기
생활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동양에서는 평생을 거쳐야 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말하는데, 
우리는 세례 받고 교회 나오면 
구원받은 자로 이미 모든 것이 
다 된 것처럼 인식한다. 
삼위일체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부단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한 상황이다. 팬데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와도 
끄떡없는 예배자로 세워나가는 것에
교회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양   자기를 해체해야 하고,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데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미루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 내 공동체 일원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이들이 우뚝 서 있으려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종들이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지탄을 받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선교사님은 요한복음 4장 말씀으로 예배에 관해 고심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예배자로서의 삶 이전에 사역자로서 허덕이고 있다고 보시는 건가.

 이   왜 그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느냐 하면 예배자가 아니면서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명한 모리슨 선교사가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할 때 이야기인데, 현지인이 모리슨 선교사 밑에서 언어번역과 훈련에 참여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로 성지순례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 최후를 기독교 사역자로 마치지 않고 모슬렘 문화권을 뛰어넘지 못하고 회귀하여 마감했다. 

이슬람권 선교사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배자와 사역자는 다른 개념임을 인식하게 됐다.  예배자 아니고도 사역(일)은 할 수 있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배자라는 단계 없이 사역으로 나가 일하게 될 때다. 사역(일)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는데, 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은 예배자의 삶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기 의지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일에 참여자로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교회 상황도 대형교회가 되고 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기본이 되는 예배자 회복훈련이 되면 삶의 자리에서 복음정신, 예배자의 삶으로 사는, 십자가의 삶으로 따라가는 삶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선교지가 된 한국교회가 힘들 수 있을 것 같다.

 양   그는 기독교로 개종해서 사역을 했는데, 나중에는 다시 이슬람으로 다시 회귀해서 갔다는 얘기는 우리가 일에 쫓기느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는 것은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조   예배자와 사역자는 일체가 돼야 한다. 십자가 부활을 거친 사람이 예배 완성자이고, 그 사람이 사역할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해 간다고 하는데, 그 논리는 신학적으로 볼 때 세속적인 신학이다. 인간은 복음의 은총이 아니면 못 간다.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 자라야 그 길을 갈 수 있다. 완료형이어야 한다. 거기서 요한복음이 다시 나오는데, 자기를 그 몸에 이루기까지. 15장, 성부와 성자가 딱 묶여있다. 16장 성령은 성자와 묶여있다. 17장은 만고의 명언, 요한복음 저자가 쓴 명저다. 17장은 성령과 성도의 장이다. 성령과 성도가 함께 있어서 성부 성자를 함께 이루는 것. 그러므로 성도는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 그 발 앞에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이뤄져야 한다. 그 발 앞에가 제자다. 그러니까 복음의 완성 지점은 요한복음. 사복음서의 완성이 요한복음이다.

 이   아까 말씀드린 십자가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은 예배자로서 살 수 있는 동인은 복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깨달음. 지성적, 감정적, 의지적으로 이뤄진 은혜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조   코로나 진단키트를 예로 봅시다. 크리스천 기본은 양치와 세수처럼, 유대교와 이슬람과 크리스천을 동시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동반적인 관계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세 종교를 풀지 못하면 코로나에서 해방 받지 못한다. 초기 예수 믿었을 때 우리 기독교가 이방의 귀신들, 공산당 등보다 이 세 종교가 셈족의 한 종교인데, 그 근원을 들어가보면 복잡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의 핵심적인 저지선이 유대교와 이슬람이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나가는 것 자체가 과욕이다. 때려잡자 이슬람 하는 사람이 선교지로 나가는 것은 무모하다. 해결하고 가야 한다. 루터나 칼빈 때까지 못했다. 루터는 꾸란을 못 읽어봤다고 했다. 지금은 500년이 지난 때다. 지금은 제2의 계몽기다. 철학은 계몽기지만 신학에서는 종교개혁기다. 제2, 3 종교개혁기가 오지 않으면 우리 구원도 미완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을 용납 못하는 크리스천 세력은 크리스천의 본류라고 볼 수 없다. 톨레랑스, 1648년에 서로 관용하자며 일어났지 않나. 그것을 제일 먼저 실천한 교황이 요한 23세다. 1962년에 그가 80세에 교황이 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톨레랑스를 실천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각 국가는 자기 말로 미사를 집전하라고 했다(그때 참으로 감격하면서 뉴스를 봤던 것이 생각난다). 그 전에 한국 천주교회도 라틴어로 미사했었다. 

가톨릭과 기독교,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관계를 단계적으로 헤쳐갈 수 없을 때 종교개혁 진정한 의미도 계속 퇴색될 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인가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제2, 3의 하나님, 예수여야 한다. 만난 예수를 자기 모습으로, 말의 표현으로, 음식으로, 삶으로 예수를 표현하는 것이 크리스천이다.

 양   관용과 용서는 참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자기를 해체하여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크리스천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슬람에 대한 정서가 한국에서는 배타적인 상황이 많이 있는데, 한국교회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

 이   모슬렘 세력을 대적해야 하는 세력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저희처럼 그들을 그렇게 해서는 접촉이 안 된다. 실제적으로 무슬림은 순박하고 친절하다. 강력하게 대적자로 보며 선동하기도 하는데 실질적인 무슬림은 다르다. 무슬림 중에 그런 이들 있어서 기독교 선교를 대적하지만 이슬람 신자인 무슬림 모두가 테러리스트라고 보는 것은 큰 오산이다. 저는 무슬림을 볼 때 ‘잠재적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이웃으로 본다. 그들도 참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그들에게 참 하나님을 소개하는 대상으로 봐야지 적대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조   잠재적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위험천만한 표현이라고 보는데….

 이   차후에 하나님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이다.

 조   유대교와 이슬람 사이에 가지고 있는 끈끈함이 있다. 이슬람이 유대인들과 정치적으로 충돌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의 속성이 이슬람을 또 다른 변종의 유대인이라고 봐줘야 한다. 이슬람은 유대인을 많이 닮았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고유한 아라비아의 성격이 중동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과 연결돼 있다. 이집트 시나이 사막으로 연결돼 있다. 서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 똑같다. 유대 이스라엘은 이스마엘이다. 정신적인 하나님의 자양분을 거기서 다 받아먹는다. 진짜는 유대교의 알맹이, 기독교의 알맹이도 이슬람이 가지고 있다. 이슬람이 무서운 세력이다. 결국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유대적으로 통합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프리카를 아라비아가 제대로 선교 못할 때 우리가 다 했다. 지금 아프리카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 기독교보다 이슬람이 더 많다. 기독교는 대를 이어 살지 못하고 나왔지만 이슬람은 그곳에 뼈를 묻고 산다. 그러니 그들 것이 된다. 선교사들도 아들 딸 2, 3대 거치면서 대를 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과 승부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기독교 선교사가 이슬람 지역에 갈 때 종신토록 살겠다는 이들, 현지인과 결혼해서 살겠다는 이들이 나와야 한다. 그게 나와야 복음의 진정성, 그들을 사랑한다는, 예수가 당신 생명을 주고 살았던 것에 우리도 시인하는 것이 된다. 예수가 무엇이 못나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겠나.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지 않았나. 그렇다면 기독교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유대인, 무슬림 속에서 살아야 공감의 지점이 생긴다. 10대 기독교 후손들이  10대 무슬림 후손들과 잘 살아내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말이나 교리책만으로 하면 입증되지 않는다. 교리를 말하기 이전에 복음의 심장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나도 예수 위해 다 줘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요한복음 속에서의 예수도 그런 모습이다.

개혁은 루터의 개혁이 아닌 제3의 개혁이어야 한다. 프랜시스 때부터 가톨릭 개혁이 일어났고 존 후스, 위클리프, 루터로 이어졌다. 지금은 복음의 말기적인 시점이다. AI시대라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며 사람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데, 기독교인이 자기를 내려놓고 예수의 요구를 따라줘야 한다. 예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그 요구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를 버리는 것 아닌가.

 양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고, 예수의 복음이나 요구를 우리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교회나 크리스천이 그것을 왜곡하고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큰 문제인 것 같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맹렬한 신앙운동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상황인데, 그것을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이   젊은 세대와 대화해보면 남의 돈 버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서 그 자체로 버거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그 동력이 복음이다.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가난한 자가 되셔서 사셨던 것을 아는 우리가 그 감격으로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그 능력이 그들 속에 나타나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복음의 능력 그 속에서 나타나는 삶으로 살아나가게 해야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보면 한국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교회 시스템에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가동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는 예배자의 회복운동이 절실하다고 본다. 교회가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회복되어서 가정예배로 연장이 되고 가정 안에서 자녀교육이 돼야 한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주일학교 상황은 사분의 일, 성인은 50프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 충격이 우리문화를 바꾸고 있다. 충격이 와야 문화가 바뀌는 것처럼 3년의 팬데믹을 통해 바뀌는 것 같다. 가정예배 회복을 통해 자녀교육이 전승이 돼야 한다. 그렇게 준비된 자로서 공예배로 준비해야 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무슬림 현지에서도 공동체에서 핍박이 오지만 개인예배자로 예배자로 세워지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이 믿어서 가정예배로 되면, 사실 그것이 교회다. 이런 방향성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배자로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예배에서 말씀일 읽는 개인은 깊은 묵상을 통해 예수와 함께 하며 세상 속에 나가서 살 때 복음이 경험된다. 이렇게 무엇인가 결단이 이뤄지지 않으면 선교지가 된 것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양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이 사실 금방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한국교회 현실은 목회자가 자기 생활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동양에서는 평생을 거쳐야 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말하는데, 우리는 세례 받고 교회 나오면 구원받은 자로 이미 모든 것이 다 된 것처럼 인식한다. 삼위일체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부단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한 상황이다. 팬데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와도 끄떡없는 예배자로 세워나가는 것에 교회는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당장 목회자 자신은 본인 가정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도 보완돼야 한다. 교단적으로도  뭔가 정책이 나와 목회자들이 품격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목회자는 오롯이 목양하는 데 전념하고, 신자는 예배자로서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은 추상적이거나 말이 아닌 실체적으로 삶속에서 이뤄져 그 동력으로 교회는 생동하게 될 것이다.  

 이   교단적으로 뭔가를 기대를 거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대책에 대해 의논하고 정책을 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들 몸부림쳐도 해봐도 잘 안 되니 패배의식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방향성은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회복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소수일지라도 그 길로 가고, 그런 경험을 하는 방향성의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조   요한은 전도를 하지도 않았고, 조직도 지휘도 하지 않았다. 존재만으로 요한이었다. 4복음서가 있다는 것은 특성을 우리 각자의 특성대로 살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요한복음의 진수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 신자 앞에서는 신자. 자기 모습을 궁극적으로 자기 표현을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동양적으로 말하면 도인, 구도자. 온 몸으로, 삶 전체로 자기 몸뚱이에 복음을 말하는 사람. 예수에게 도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가 예수다.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 예수가 구약에서는 메시아. 성령 강림 이후에 예수는 교회다. 교회가 예수 심장이다. 예수의 껍데기 속에 가짜, 위선, 도둑, 세습자, 장사꾼 다 있다. 교회 깊은 속에는 예수가 있다. 거기에 속아서 껍데기만 보고 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교회에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양   존재로서의 요한이라는 말씀, 늘 요한복음은 미공개복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공감이 간다. 예수님을 자기 몸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말씀을 실현해내기에는 교회 가 너무 시스템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여유 있게, 옛날 우리 조선의 선비들이 굶어죽어도 빌어먹으러 다니지 않았다고 하듯이 한두 끼 먹지 못해도, 가난을 자처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려는 몸부림과 현장이 우리 속에서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종교개혁 정신을 다시 자각하고 교회가 예수가 되는, 교회 심장이 예수가 되는 교회로 회복이 되면 성도들도 지체이니 교회 심장인 예수를 따라 삶의 예배 가운데 복음이 드러날 것이다. 상황은 절망스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당신의 사역을 이끌어 가시는데 우리(교회)가 사용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양   하나님의 사역을 기다리지 못하고 현실의 문제에 연연하는 것을 극복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이끌려가는 삶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한국교회 성도와 목회자들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개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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