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향한 여정(2)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 만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돈의 노예상태로 빠져든다. 한참 후에야 하나님이 아닌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도, 한 번 빠져버린 곳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은 자신을 합리화시킬 뿐이다.”

선한목자교회 담임 김명현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김명현 목사

‘인간개발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빌과 함께 워싱턴 D.C.로 간 나우웬은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을 주제로 세 차례 강연을 한다. 첫 번째 강의 주제는 ‘현실타협에서 기도로’(From Relevance to Prayer)이다. 필자의 이해를 중심으로 나우웬의 그 첫 번째 강의를 소개하고 선한목자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현실 문제를 이해하고 타개해 나갔는지, 그 핵심에서 소명과 기도가 어떻게 적용됐는지 소개한다.


헨리 나누웬의 현실타협에서 기도로

크리스천 리더들은 매우 바쁘게 보내지만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도 변화는 없다. 교인은 점점 줄고 있으며, 사람들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들을 더 신뢰한다.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돌들을 빵으로 바꾸라.’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첫 번째 시험은 현실에 충실하라는 것(to be relevant)이다. 크리스천 리더들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 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이런 일들은 더 이상 그들의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리더들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더러는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여, 교회를 떠나 동시대 사람들과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relevant) 헌신을 하고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가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irrelevant) 진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다. 힘과 능률, 지배를 추구하는 세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거부하지만, 우리는 두려움과 소외감과 절망 없이 이 사랑을 계속해서, ‘급진적으로’(radically)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할 때,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고,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권세를 얻어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신비주의자(mystic)가 되어야 한다. 신비주의자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영적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그분의 실존 안에 거하는 훈련인데, 이런 훈련이 관상기도다. 관상기도는 주변의 모든 일들과 사람들이 그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자유로우며, 이미 집을 찾았고, 벌써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깨달음을 심화시켜 준다.

오늘날 신학은 그저 여러 학문 가운데 한 영역이 되고 말았지만, ‘신학’이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두 가지 점에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나우웬은 ‘급진적’(radical)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다. 한국어 번역은 이 표현을 순화시키거나 생략하고 있다. 영어권에서 표현되는 급진적이라는 말에는 ‘실천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마더 테레사’를 급진적인 신앙인이라고 평가하곤 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주는 실천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것이다. 나우웬은 관상기도와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말 번역은 ‘묵상기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 안에서 기독교적 관상기도의 전통이 존중되고 살아나길 기대한다.


선한목자교회에서 공동체 정신 살려내기

필자가 10여 년 동안 청소년들과 장애인들, 동네 노숙자들과 함께 할 때, 주변의 선배 목사들에게 끊임없이 들었던 말은 ‘먼저 교회를 성장시키라’는 것이다. 교회가 자립하고 일할 교인들이 많아지면 하고 싶은 일을 보다 손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필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충고를 유혹이라 여겼다. 하지만 필자 역시 목사로서 교인 숫자에 대한 압박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숫자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1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곤 한다.

90년대에는 많은 목사들이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당시 공부방) 그리고 복지시설 등을 관(시, 군, 구 등)의 지원 하에 교회 안이나 외부에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나 생활비를 확보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당한 목회처럼 보였다. 후에 선한목자공동체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자, 시의 자문변호사는 전화를 걸어와 시설로 등록하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했다. 도청의 사회복지 담당자는 직접 찾아와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 우리에겐 어떤 위법도 없었기에 그것은 정말 협박이었다. 우리는 시의 허가가 필요한 어떤 시설도 세우지 않았다.

크리스천 리더들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곧바로 돈의 유혹에 빠져버리곤 한다. 첫째 돈은 능력을 드러나 보이게 한다. 어린이나 노인, 장애인 등을 위해 시의 지원을 받아 시설로 등록한 번듯한 건물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목회자의 불안정한 삶을 단 번에 안정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지급된 돈은 이웃이 아닌 시의 요구에 우선하라고 지급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 만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돈의 노예상태로 빠져든다. 한참 후에야 하나님이 아닌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도, 한 번 빠져버린 곳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은 자신을 합리화시킬 뿐이다.

선한목자공동체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지 않았으며, 장애인이나 노인 등을 위한 센터도 만들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을 만들어 달라는 주변의 적극적인 요청도 있었다. 하지만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공하겠다는 관의 모든 제안을 그리스도의 종에게 던져진 유혹일 뿐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선한목자공동체를 세우는 첫 단계는 침묵과 노동의 훈련이었다. 장애아동들, 가출청소년들과 함께 하고, 때론 아이들과 대안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관상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정해진 시간이면 묵묵히 청소했다.

침묵 가운데 기도하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귀를 기울이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내가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나를 헌신하는 일이다. 훈련 가운데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접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음성듣기와 제비뽑기, 그리고 양심이 그것이다. 그 내용과 의미에 앞서 중요한 점은 이 모두가 우리의 따름을 전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을 내려놓고 더 큰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선한목자공동체 중 하나인 어린이 식당 마루에서 지난해 가진 할로윈 파티. 
선한목자공동체 중 하나인 어린이 식당 마루에서 지난해 가진 할로윈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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