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compassion)과 오병이어 기적(1)

빵과 물고기의 기적에 앞서,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이미 기적이 있었다. 예수의 연대의 정은 기적을 일으키는 유일한 동인이다.

연대의 정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기적은 다름 아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이자 행동이다.

기독교의 이타적 사랑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자녀를 죄로 가득 찬 인간에게 보냈다.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된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크고 완전한 이타적 사랑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compassion’이다. ‘야훼’ 하나님이 보여준 ‘compassion’은 인간과 ‘함께’(com)하려는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의지이자 열정’(passion)이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할 모든 근거가 여기에 있다.

‘compassion’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정’ 혹은 ‘연민’으로 나온다. 한자어 ‘동정’(同情)은 영어 단어 구조와 정확하게 상응하는 단어이지만, 실제 어감은 우월과 비하라는 계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연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연대의 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의미 상 가장 정확해 보인다. 따라서 필자의 글에서 ‘연민의 정’은 ‘compassion’을 의미하는 것임을 밝혀 둔다.

마태복음에 따르면(14장)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는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은 예수가 성인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중에 제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될 터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고,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예수는 기적으로 와서, 기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라는 기적을 이룬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시작된 기적을 일으키는 운동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 반복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간다. 이 모든 기적의 출발점에 연대의 정이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작: 물러남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13절)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제자들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 또한 요한의 제자이자 동역자였다. 이제 스승이자 동역자이던 요한이 죽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헤롯에 의해 참수된 요한을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12절) 예수는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던 그곳으로 가서 스승이 하던 사역의 뒤를 이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요한의 제자들까지 흡수해 큰 무리를 이루어 요한이 다하지 못한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자신의 새로운 메시지도 선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온 것도 그러한 기대 때문이리라.

그러나 예수는 스승이었던 요한의 무덤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스승을 잃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지도, 그들을 부르지도, 그들에게 지시하지도 않는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에서 예수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건너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수의 운동을 요한의 운동과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예수가 가야할 길은 요한의 길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요한과 분리된 예수의 첫 번째 발걸음 앞에 따라온 무리들이 등장한다.
 

기적의 목격자와 참여자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기적의 목격자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안고 예수를 찾아갔다. 때로는 고통 받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갔다. 어떤 이들은 기적을 직접 체험했고, 또 다른 이들은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목격했다. 기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은 그 소문을 빠르게 전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신앙이 완전하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기적의 불순한 의도를 찾기 위해 예수를 엿보았다.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 역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사회질서를 최우선하는 자들이었기에 예수의 기적 행위 속에서 사회적 불안 요인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어쨌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적의 ‘목격자’들은 소문을 운반하는 기적의 ‘전달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그들은 예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청취자’이거나 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이다. 청취자이거나 독자로서 그리스도인 역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전달자가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인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교회 역시 교인들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예수에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가 직접 부른 제자들이라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목격자 혹은 복음의 전달자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제자들도 기적의 목격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동거, 동행하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적의 현장에 늘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기적에 관한한 누구보다도 직접적인 목격자들이었기에 정확한 전달자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어떻게 불어났는지 모른다. 아마 제자들은, 그리고 제자들의 제자들과 복음서의 저자들은 기적의 과정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 그들은 기적을 목격하고 전달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제자들은 기적에 동참하는 ‘참여자’여야 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기적에 참여시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기적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제자들이 어떻게 기적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도 일어나는, 그리고 일어나야 하는 기적에 참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기적의 출발: 예수의 연대의 정(compassion)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compassion),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14절)

예수는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동네에서 몰려나와 예수를 따라왔다. 배에서 내린 예수는 따라온 사람들을 보고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깊은 ‘연대의 정’(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불쌍히 여기다’로 표현한다)을 갖는다. 그는 병든 사람들을 말없이 고쳐주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아이들 외에도 남자들만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바로 여기,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연대의 정에서 출발한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에 앞서,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이미 기적이 있었다. 마태복음은 ‘오병이어’에 앞선 이 기적에 대해 예수의 연대의 정 이외에 어떤 다른 원인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간청도 없고 믿음의 고백도 없다. 예수의 연대의 정은 기적을 일으키는 유일한 동인이다.

연대의 정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인간이 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연대의 정이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기적은 다름 아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이자 행동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