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compassion:불쌍히 여김, 연민)과 오병이어 기적(2)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연대의 정, 즉 ‘동정’이란 단어는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가치다. 여기서 기적은 시작된다.

‘공감’은 타인을 향한 열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 해결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의 공감을 연대의 정으로 바꾸는 결정적이며 위대한 말을 한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예수의 연대의 정(compassion)은 기적을 일으킨다. 아니, 연대의 정만이 기적을 일으킨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던 요한의 메시지가 인간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활동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 점에서 예수는 요한과 달랐다. 예수는 사랑 때문에 여전히 죄인인 사람들에게 연대의 정을 드러낸다.


            공감(sympathy)           

우리는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들과 ‘공감’(sympathy)하는 예수를 본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했다고 그들과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는 한 어떻게 시각장애인과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체장애인이 아닌 한 어떻게 지체장애인과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병든 자들과 같은 병에 걸려 보지 않는 한 그들과 ‘같은 감각적 체험’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는 3년 전, 자전거를 타다가 고관절 바로 아래 대퇴골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골절부위가 신경을 건드리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수술과 수술 이후의 통증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술하기까지 이틀 동안 순간순간 밀려왔던 고통은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필자는 경험하지 않은 고통에 공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가 너희에게 공감한다’고 말하면서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그가 예수다. 예수는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자신처럼 온전해지도록 했다. 그는 한 번도 자기를 찾아온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들에게 ‘공감’만을 표한 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랬다면 예수는 여전히 하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연대의 정(compassion)           

사람들은 예수가 일으킨 현상을 보고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킨 예수를 보고 존경심과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나 혹은 마술사로 이해하기도 했다. 한편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그리스도)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을 예수의 메시아 됨을 증거 하는 ‘능력’으로 여기며 읽는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일으킨 동인(動因)은 떠올리지 않는다. 기적의 동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하늘에 머물도록 할 뿐이다.

현대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적이 없다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며 교회에 나가지만 기적을 보지는 못한다. 오늘날에는 예수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 교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신앙 속에서 예수는 하늘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대의 정’이 없기 때문이다. 연대의 정이 없는 곳에 기적은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연대의 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연대의 정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연대의 정을 지닌 사람은 타인을 피하지 않으며, 공감을 표하면서 그저 그 앞에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과 함께(com)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의지와 열정(passion)을 다한다. 그때 타인에게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변화, 그것이 기적이다.

사실 필자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뇌는 기적이라는 단어에 민감하여, 연대의 정이란 단어를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연대의 정을 가려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대의 정이 드러난 곳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결과가 있다. 기적은 연대의 정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공감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14:15)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날이 저물 때까지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들도 똑같이 배가 고팠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배고픔에 ‘공감’하고 있었다.

공감은 같은 처지에서 똑같이 혹은 동시에(sym) 느끼는 감정(pathy)이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똑같이 굶었다면, 그들은 모두 동시에 같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칼에 베이고 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아픔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누구나 슬퍼한다. 이렇듯 공감은 주어지는 상황이 같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따른 반응이다. 따라서 공감이란 의지를 수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감 능력’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공감하기 위해 능력까지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뿐이다. 필자는 현대인들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상 같은 처지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배고픈 사람과 ‘공감’하기 위해 지금 배부른 당신이 갑자기 배고파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남자는 어떤 식으로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공감 능력’이란 허구의 단어일 뿐이다. 단지,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 배부른 당신이 과거에 배고팠던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공감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당신의 배고픔과 지금 배고파하는 사람의 배고픔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공감을 방해할 뿐이다. 그것이 서로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적대감을 키우기도 한다.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세대 간의 갈등은 많은 경우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세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 너를 공감하지 못하며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공감은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며, 의지를 수반하는 말도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기에 공감할 수 없지만,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싶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연대의 정, 즉 ‘동정’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우리가 멀리한 이 단어는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가치다. 여기서 기적은 시작된다.

공감은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제안한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제자들의 생각에 무리는 각각 마을로 가서 그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를 채울 것이다.(마태복음 14장에서 ‘오병이어’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타인을 향한 열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 해결로 나아간다. 이로써 나와 너의 간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자들의 공감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드러냈던 연대의 정(14절)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쳐야 했다. 예수는 제자들의 공감을 연대의 정으로 바꾸는 결정적이며 위대한 말을 한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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