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compassion:불쌍히 여김, 연민)과 오병이어 기적(3) - 놀랍지 않은 기적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 우리는 이 변명으로 천국만 약속받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 것이 타인과 연대하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다.’(compassion)

자신들의 배를 채울 음식이 타인의 배를 채울 것으로 바뀐다. ‘소유가 나눔으로 바뀐다.’ 이것이 연대의 정과 기적 사이에 있었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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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에 참여하는 제자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병이어’ 이야기는 예수가 기적(빵과 물고기 늘리기)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된다. 덧붙여 제자들에게 믿음과 그에 따른 능력을 가르치려고 그렇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은 예수와 그가 행한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 예수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된다. 오병이어 이야기의 포커스를 기적에서 연대의 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특히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그러하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더불어 세례 요한은 회개를 요구했다. 요한의 회개는 하늘나라를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한 변화를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행동의 변화를 보여야만 한다. 회개는 실천이다. 그러나 예수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에게 연대의 정을 느꼈다. 연대의 정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제자들은 이 연대의 정에 함께 참여하도록 요구받은 것이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모여든 무리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들과 느꼈던 공감을 연대의 정으로 바꾼다. ‘먹을 것을 사먹게 돌려보내라’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공감(sympathy)과 연대의 정(compassion)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드러낸다. 공감이 연대의 정으로 바뀔 때, 기적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비범한 능력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연대의 정이 비록 기적의 출발이라고 해도 예수의 능력이 실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 주위에 모여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해는 당신에게 연대의 정이 없음을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대의 정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의 기적에 의존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기적이 없음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에게는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한 것은 곧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편한 그리스도인의 자기변명인가?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 우리는 이 변명으로 천국만 약속받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17절)

예수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제자들이 예수께 한 말이다.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only)고 함으로써 그것이 자기들의 양식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마을로 돌아가면,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쉬면서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사람들과의 공감에서 출발해서 자기 연민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자기 연민을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18절)

예수가 명령하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병이어를 내어놓는다. 자신들의 끼니를 위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 것이 타인과 연대하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다.’(compassion) 제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오병이어를 가져다주었다는 묘사조차 없다. 침묵과 생략은 소유에 대한 완전한 포기만을 드러낸다. 조그만 기부에도 상대의 조건(교회 다니는지, 가난한지 등)을 따져가며 생색내기만을 좋아하는 교회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19절)

내려놓았던 것은 이제 다시 들려져야 한다. 그때 그것은 더 많은 이들을 향한 축복의 원천이 된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들고’(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축복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제 예수에 의해 들려진 빵과 물고기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간다. 제자들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준다. 자신들의 배를 채울 음식이 타인의 배를 채울 것으로 바뀐다. ‘소유가 나눔으로 바뀐다.’ 이것이 연대의 정과 기적 사이에 있었던 과정이다. 마태복음이 드러내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20-21절)

제자들의 것이 무리의 것이 되자 모두 만족했다. 누군가의 소유가 내려놓음과 들려짐, 그리고 나누어짐이 되자 유일하게 드러난 사실은 만족이다. 기적은 빵이 늘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족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어난 빵에 기적의 초점을 맞추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조그마한 일부조차도 내려놓지 않는다. 늘 부족하다고,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놀랍지 않은 기적                                            

당신은 그 빵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샘솟듯이 솟아났는지, 빵이 떼어지는 순간 빵이 다시 커졌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가 가진 능력을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호기심은 예수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려는 하늘나라의 핵심 가치인 연대의 정에서 눈을 돌리게 할 뿐이다.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놀랍게도 마태를 비롯한 다른 복음서에도 빵과 물고기를 예수의 능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묘사는 전혀 없다.)

이 사건의 기록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가르침과 치유에 사람들은 늘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이 사건(동시에 남자만 오천 명이라니!)에 사람들은 아무도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가 드러내는 능력과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연대의 정을 제자들에게 몸으로 보여주고, 제자들이 깨달아 연대의 정에 참여하도록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명백하다.

우리는 복음서의 병행구절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이해하곤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예수의 파송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하는데서 시작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막 6:31) 마가복음에서 외딴 곳으로 ‘물러남’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드러낸 배려다. 그러므로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다’는 제자들의 요청은 자신들에게 쉬라고 했던 말을 예수에게 다시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병이어가 한 아이의 소유였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요 6:9)에 등장한다. 이것을 마태복음에 덧붙여 이해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다. 어쨌든 복음서의 전개 방식은 각기 다르다.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를 전체 글의 중간 즈음에 꺼낸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필자의 해석은 마태복음에 충실한 것이며, 이어질 주장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히려는 것이다.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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