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자 김용규

7편의 영화 통해 삶과 세계의 절망적 파국 극복하는 7가지 방법 제시한 타르콥스키, 그를 ‘파수꾼’(예언자)로 소환해내다

독일(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을,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서인지 그가 펴내는 글들은 이 두 부문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번에 내놓은 책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에서도 영화감독인 타르콥스키를 통해 ‘구원’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점과 ‘새로운 위기의 신학을 위한 7가지 메시지’라는 부제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과 사람을 잇대어 놓고 있는지 기대하게 한다. 위기의 시대 속에서 타르콥스키를 소환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제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을 통해 오늘의 우리가 타개해 나가야 길에 대해 나눴다.                                                                      <편집자 주>

  선생님 책이 나올 때마다 기대가 되는 이유는 인간 삶을 이루고 있는 철학, 인문학, 신학, 그리고 문화와 종교 등이 글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조명하고 계신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저는 구소련의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를 우리 시대의 파수꾼으로 내세우고자 합니다. 성경은 파수꾼이라는 용어를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지키고 보살피는 예언자, 선지자를 일컫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애통하며 꾸짖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에 대해 예언하시기 위해 불러 세운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탁월한 구약학자이자 설교자인 월터 브루그만에 의하면, 그들은 단순히 우리가 만들어온 잘못된 세계를 고뇌하고 애통하며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에 대해서만 울부짖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동방정교에 심취했던 타르콥스키는 이 같은 파수꾼의 사명을 탁월하고 집요하게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평생 동안 만든 7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파괴하며 구제할 길 없이 멸망으로 이끄는 삶의 메카니즘을 온 세계에 폭로하고 전향을 호소”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마지막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이지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인문학자인 김용규 선생&nbsp;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인문학자인 김용규 선생 

 

  영화 하면 보통 감성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통한 따뜻함을 많이 담아내고 있는데, 선생님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교회의 역할인데, 영화작품들을 통해 구원을 말하다니 신선하기도 하고 궁금합니다. 

- 영화를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내세우는 것은 영화의 본질을 시적 이미지로 간주하는 타르콥스키의 매우 특이한 생각인데요, 그래서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유구한 신학 전통과 심오한 현실비판이 뒷받침하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유구한 전통에 근거했다는 것은,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787년)가 “우리는 말씀과 성화상(icon)으로 우리의 구원을 고백하고 선포합니다”라고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동방정교에서는 성화상을 구원의 한 축으로 간주합니다. 이 말은 언어뿐 아니라 이미지도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요. 따라서 영화를 언어에 의한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 극적 구성)가 아니고 이미지에 의한 포에지(Poesie: 시적 구성)라고 규정하는 타르콥스키에게는 영화가 성화상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수단인 거지요.

타르콥스키의 주장이 심오한 현실비판이라 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가도, 사상가도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자신들이 믿는 진리에 대해 그럴싸한 말만 장황하게 떠벌릴 뿐 그것의 구현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겨 버리는 식으로 혁명, 교육 또는 교화를 실행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이 말에는 언어에 의한 혁명, 교육, 교화에 대한 타르콥스키의 심각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타르콥스키는 우리가 정보의 과잉에 빠져 “말이 신비하고 주술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한낱 “공허한 잡담으로 변질된 이때, 영상과 시각 이미지들은 존재의 원천을 찾아가게 하는 일을 말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한국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기후위기, 전쟁 등의 현상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위기의 신학을 위하여’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 잘 알려졌듯이, “위기의 신학”이라는 말은 20세기 초 사상 초유의 희생자를 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후, 칼 바르트, 투르나이젠, 부룬너와 같은,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만들어 사용한 용어입니다. 인간이 이성과 그 실천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만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며, 그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눈얼음 계곡’, ‘극지역”’, ‘황폐지대’가 놓여 있다는 거지요. 이 말에는 모든 세대를 걸쳐 인간이 당면하는 위기의 원인과 탓이 오직 인간에게 있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신학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부정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신학에서 하나님의 부정은 단순한 부정과 심판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으로 나타나지요. 그리스도는 죄 속에 있는 인간과 세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을 긍정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투르나이젠은 이처럼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는 변증법적 해법을 “오직 무덤이 있는 곳이어야만 부활이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해 표현했지요. 바로 이것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위기의 신학의 본질이자 희망입니다. 
 

예언자 신학에 귀를 기울이고, 소비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그와 함께 자라나는 이기주의와의 전쟁에 발 벗고 나서야 할 때… 타르콥스키,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물질주의와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기주의의 전면적인 포기” 절실하게 설파


  독일의 시인 휠더린은 시인을 “신의 빛살을 제 손으로 붙들어, 백성들에게 노래로 감싸서, 천국의 증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읊었는데요, 선생님은 타르콥스키가 바로 그러한 영상 시인임을 언급하시면서, ‘타르콥스키가 전해 준 신의 빛살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종말론적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의 예지적 저서인 〈위험사회〉에서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위험들을 그 이성으로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말론적 위기-예컨대  팬데믹과 기후위기, 그리고 전술핵무기와 유전공학 그리고 AI의 위험 등-를 만든 것은 인간의 이성이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벡은 ‘이성의 자기 회의’와 ‘성찰’을 해법으로 제시했지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말론적 위기를 극복할 해법이 투르나이젠이 설파한 대로, “모든 인간적인 확실함의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져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이성적인 이해타산이 좌절되어야만, 모든 인간적인 욕망이 완전히 제압되어야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있다고 봅니다. 타르콥스키가 일곱 편의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과 그것의 대안으로서의 믿음, 사랑, 희생이었습니다. 그는 〈순교일기〉에 “오직 사랑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당면한 종말론적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이 이 책에 7가지 메시지로 담겨 있다고 하는데, 그 제목을 보니 영화 이야기를 통해 ‘이 땅에 고향이 없다’를 시작으로 ‘믿음, 양심, 욕망, 도덕, 구원, 희생’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통해 신학의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주제들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이 주제들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 있어서 한국교회 구성원들의 함량이 많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그렇습니다. 타르콥스키는 7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의 절망적 파국을 극복하는 7가지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습니다. 요컨대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물질주의와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기주의의 전면적인 포기”를 절실하게 설파했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말씀하신 대로 그 진정성 있는 해법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한국교회와 구성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주된 원인은 기독교에서 흔히 ‘죄성’이라고 일컫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겠지요.  

따져보면 실낙원 사건 이후 인간에게는 오직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숭배와 물질숭배, 하나님 사랑과 물질 사랑,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과 세상을 향한 욕망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바로 이 선택지 앞에 서 계셨지요. 그리고 악마에게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0)라고 외치셨고, 빌라도에게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복음 18:36)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예수님의 진실한 가르침과는 달리―언제나 하나님 숭배보다 물질숭배, 하나님 사랑보다 물질 사랑,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보다는 세상을 향한 욕망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근대 이후, 인류는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등, 무척이나 다양한 정신적 사조들을 실험해온 것 같지만, 그 공통된 바탕은 오직 물질숭배의 근대적 양식인 ‘물질주의’였습니다. 그것에 힘입어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콘큐피스켄치아’(무한한 탐욕)라고 이름 붙인 마성이 사슬을 끊고 나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교활하고도 광폭한 그 마성은 상업성 위주의 대중문화와 매체 그리고 광고와 유행을 통해 우리의 허영을 충동질하고 타인에 대한 선망과 질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즉각 실현하도록 추궁해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에 응하지 못할 경우 한없이 불행하다거나 비참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지요. 소비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지 않는 자는 존재하지도 않지요. 때문에 그 수많은 종교적, 철학적, 사회학적, 생태윤리학적 성찰과 그에 따른 위협적 경고조차도 우리에게는 무력하기만 합니다. 마치 미끄러운 경사길에 올라선 것처럼 우리의 삶은 이미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겁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로 꼽는 것 중에 ‘물질주의’에 휩쓸려 있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이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고 보시나요?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은 ‘후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해왔지요. 한국교회가 지닌 유별난 물질주의적 경향은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가 후반에 등장한 후기 자본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을 ‘생산자’로서뿐 아니라 ‘소비자’로서 사용하는 경제체제를 가리킵니다. 산업자본주의라고도 불리는 초기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의 축적과 생산 조건(공장, 도로, 철도, 항만, 통신 시설과 같은 기간 시설)의 확립이 요구되었습니다. 때문에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생산자’라는 위치를 부여하고, 금욕주의와 소명의식이 대변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근거한 근면, 검소, 절제, 시간 엄수와 같은 노동의 윤리를 가르쳤지요. 이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분석한 초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기간 시설이 완비되고 생산 시스템이 완전히 가동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는 ‘생산성’이 부단히 향상되었지요. 게다가 20세기에는 과학기술이 놀랍게 발달하여 그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자 20세기 후반부터는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산체계가 붕괴될 처지에 놓였지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후기 자본주의입니다.

요컨대 후기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된 상품들을 과잉소비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생존하는 경제체제이지요. 때문에 이때부터 정부는 구성원들에게 ‘생산자’로서뿐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새로이 부여하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낭비, 무책임, 몰지각, 부정의로 구성된 비윤리적이고 탈주체적인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를 알게 모르게 주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소비를 애국으로 포장하는가 하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고, 신용카드를 발급하여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소비가 가능한 새로운 지출방식을 열어놓았습니다. 또한 언론과 기업들은 자극적인 광고와 변덕스런 유행을 통해 정상적인 수준에서는 불필요한 소비를 숨이 막히도록 부추겼습니다. 요컨대 정부의 개입, 확산된 대중문화, 발달한 미디어와 마케팅 전략 등을 통해 숨쉴 틈도 없이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문제는 기독교가 초기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저버리고, 소비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에 편승해 성장해왔다는 데에 있는데, 한국교회가 그런 경향을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어나올 방법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단지 그것의 실행이 어려울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모두 후기 자본주의의 강압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물질주의와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기주의”의 전면적인 포기’를 실행하고,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희생시킬 자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실로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이지요.

그러나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경험한 코로나19 팬데믹과 주기적으로 또다시 다가오리라고 예상되는 다른 팬데믹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후위기와 같은 종말론적 위기들이 우리를 각성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항상 용서하고, 인간은 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고가 그래서 나왔는데요,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도 위기의 신학, 이 책에서 제가 말하는 파수꾼 신학, 예언자 신학에 귀를 기울이고, 소비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그와 함께 자라나는 이기주의와의 전쟁에 발 벗고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희생은 말이 아니라 그것을 육화하는 행동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선생님은 보고 계십니다. 12월 24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이 육화된 (성육신) 사건도 ‘희생’으로 보시는 겁니까. 오늘 우리는 왜 그것을 알면서도 그 길에서 멈칫하거나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요.

- 저는 성육신이 지닌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육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고 믿지요. ‘오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마저도 말씀만으로는 인간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매달리는 ‘행위’를 통해 그 일을 이루셨지요. 하나님께서도 그리하셨다면 하물며 인간인 우리로서야, 자신의 말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는 ‘언어의 육화’ 말고 인간과 세상을 구할 방법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동방정교에서는 ‘자기 희생’으로도 표현되는 이 신비롭고 은혜로운 프로세스를 ‘케노시스를 통한 테오시스, 곧 ‘세속화를 통한 신성화’ 또는 ‘자기 비움을 통한 자기 고양’,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이라는 다양한 방식로 교훈합니다.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부정신학의 핵심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덤에서 부활로, 하나님의 부정에서 하나님의 긍정으로 진행하는 변증법적 신학이 발 딛고 있는 기반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예언자 신학’, ‘파수꾼 신학’의 본질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 교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이겠지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의 대안으로 제시한 믿음, 사랑, 희생 “오직 사랑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책에는 ‘주요 인물 해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주제마다 그와 연관이 있는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칼 바르트, 월터 브루그만 등 35명의 작가, 신학자, 철학자가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의도가 있습니까.

- 네, 이번 책은 서문과 일곱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끝마다 내용을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놓은 부분을 별도로 끼워 넣었습니다. 좀 특이하게 보일 수 있는데요, 그 이유는 한 작가나 사상가의 주장은 그의 생애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작가나 사상가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슨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삶을 살았고, 누구와 교류했는지 등이 그의 주장이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에는 문학인, 철학자, 신학자, 영화감독 등, 매우 다양한 인물들이, 말씀하신 대로 35인이나 등장합니다. 이들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약간의 설명을 첨부해주는 것이 독자들 스스로 인명사전을 찾아보는 수고를 덜어주고,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타르콥스키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께는 이 작업을 하시면서 어떤 울림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타르콥스키는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매몰된 인류가 파멸될 위기 앞에 서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절망적 국면에서도 인간을 구하려는 노력과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구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의 위대함이 그토록 오래 지구를 지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피곤에 지쳤을 때조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환멸에 빠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똑같은 마음으로 일곱 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타르콥스키는 희망과 믿음이 없는 세계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와 대치되는 이상을 보여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 전술핵무기와 유전공학 그리고 AI의 위험 등이 이미 널리 알려졌는데도, 마치 침몰하는 배 위에서 선상 파티를 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살아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이지요. 그것이 제게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선생님께는 예수님의 오심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동시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분의 오심을 어떻게 나누고 싶으신지요.

- 제게는 신학에서 성육신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오심이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그리하셨듯이 우리 역시 인간과 세상을 바꾸려면-달리 말해, 진실이 편견과 미신과 거짓을 이기게 하려면, 악이 선의 광휘 앞에 굴복하게 하려면, 추함이 아름다움의 눈부심에 퇴각하게 하려면, 자유, 평등, 박애가 강처럼 흐르게 하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종말론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육화하는 행위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 믿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기적도 믿지 못할 것이 없고, 세상의 그 어떤 절망에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타르콥스키가 그의 마지막 작품 <희생>에서 전하는 우화도 바로 이것을 뜻하지요. 내용인즉, 어느 사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라죽은 나무에 물을 길어다 주었더니 3년이 지나자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혔다는 거지요. 저는 성탄절을 맞아 우리 모두의 삶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양승록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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