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권 교수, 제4차 로잔대회에 즈음해 현재 ‘복음주의’가 담아내야 할 통전적 선교 제시

5항인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개인 복음전도와 균형맞출 저울추 위에 올려질지 주목

한국신약학회(회장 이민규)가 1월 20일 오후 1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1월 간담회를 가졌다. 제4차 로잔대회에 즈음하여 ‘기독교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김회권 교수(숭실대)는 준비한 발제문 외에 별도로 자유롭게 발제했다. 본지는 로잔대회가 어떤 대회로 이어져왔는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발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발제자 김회권 교수<br>(숭실대 기독교교육)<br>
발제자 김회권 교수
(숭실대 기독교교육)

오늘 발제할 내용은 로잔대회가 이뤄냈던 그동안의 결실, 로잔 언약의 파열음, 로잔 언약 또는 로잔 선교대회가 그 이후에 대회를 거듭할수록 노정시켰던 문제들이 뭔가를 다룹니다. 한국에서 로잔선교대가 열리는 것이 이 선교운동의 역사상 순차적이고 매우 기대할 만한 대회 개최인지 아니면은 좀 엉뚱한 면이 있는 건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 로잔언약과 WCC

로잔언약대회는 1974년에 열렸죠. 그런데 1974년 이전에 1968년에 웁살라라는 WCC 선교대회가 열립니다. 그런데 이 웁살라 선교대회가 큰 충격을 줍니다. 68년에 이미 WCC는 헝가리, 체코, 폴란드 공산주의 국가까지 전부 다 개혁교회연맹, 세계교회협의회의 참여를 시켰습니다. 공산주의 국가 안에서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었는데 이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공산주의 국가는 반기독교적인 무신론 국가로서 교회를 박해하는 정권인 줄 알았는데, 사회주의 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 안에도 교회가 있고, 신학자가 있고, 또 심지어 세계교회협의회도 참여하는 걸 보면서 굉장히 불편한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독일이나 스위스에 살았다면, 세계개혁교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았다면 문제가 전혀 안 되는데, 우리는 1959년 WCC 가입 문제로 한국 장로교가 크게 분열된 상처를 안았기 때문에 WCC만 하면 용공주의 세력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을 견인하면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 진지를 구축하는 데 기독교가 뭔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은근히 보여줬습니다. 그러니까 WCC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 거죠. 그래서 굉장히 WCC가 글로벌하게 전 세계적인 네트워킹을 가지고 엄청나게 젊은 사람들을 많이 합류시키는 걸 보고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가 깜짝 놀랐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는 빌리 그래함 전도를 돕는 전도 부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왜 미국에서만 그렇게 복음주의 운동이 그렇게 거리를 초월하고 다니면서 떼로 사람을 불러놓고 복음을 전하는지, 왜 미국에서만 그렇게 활성화되는지 그게 굉장히 궁금해져야 됩니다. 왜 미국에서만 그렇게 지역을 넘고 초경계를 넘어서 그렇게 많은 부흥운동 또는 개인 전도 운동이 있었는지 이거는 진짜 교회 역사상 참 이국적인 현상입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하기 전후에 고등 교육 기관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700년대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학이 10개가 채 안 됐습니다. 대부분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링컨 대통령도, 최초의 주불 대사 벤자민 프랭클린도 대학을 안 나왔어요.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가 뉴저지 주, 펜실베니아 주, 뉴욕 주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지적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걸 봤습니다. 대부분이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요. 여기에서 빌리 그래함 식의 전도 복음을 아주 축소시켜서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만드는 대중적 지표가 필요했던 겁니다. 굉장히 미국적인 현상입니다.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그런 현상이죠.  

그래서 180년 경에 카르타고의 교부였던 터툴리아누스가 카르타고에서 시작했던 그 일 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티니지 수단 알제리  이런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수준도 전혀 안 되니(그리스 사상, 성경도 모르는) 사도신경을 읽어주고 이걸 따라하라고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사도신경만 가르쳐도 신앙이 전달된 이유는 사도신경을 고백한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완전히 비고백처럼 달랐기 때문에 이사야, 예레미야는 몰라도, 산상수훈은 몰라도 그냥 거룩한 삶이 나름대로 가능했습니다. 260년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과 클레멘트 때까지 약 70~80년 내내 무식 대중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약식으로 전했습니다. 이게 전통이었습니다. 신앙을 약식으로 가르쳐도 문제가 전혀 안 됐습니다. 왜? 삶 자체가 너무 달랐고, 어울리는 그룹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지가 됐습니다. 그렇게 구약을 모르고 성경을 몰라도 신약 성경 공부시킬 생각을 못했습니다. 

# 빌리 그래함의 대중전도가 가능했던 이유

미국 영국 식민자들이 넓은 대륙에 5천km가 넘는 길이에 띄엄띄엄 10시간 말을 타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니까 학교, 교회를 세울 수도 없는 거고 아무것도 안 됩니다. 10시간 달려야 사람 만나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대중 복음 전도를 빌리 그래함이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 뒤에 나왔던 찰스 피니에게서 이어받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초창기에 가졌던 창의적인, 지름길 같은 방식이 안 되니까 빌리 그래함 때는 가짜 구원 감정주의, 일종의 구원이 임했다고 하는 과장적인 어떤 그런 구원감, 과장적인 하나님의 임재감이  인위적으로 복음성가에 함께 주입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지 않는데 우리나라 지금 복음성가가 전혀 현실과 유리된, 하나님이 굉장히 대한민국에 와서 완전 진을 친 것처럼 보이는 이런 복음성가의 찬양 너무 많습니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 예수님이 진짜 우리 교회에 와 계신 것처럼, 그렇게 거짓된 임재감 또는 친근성을 강조하는 이런 노래들이 굉장히 무디의 노래도 많고 생키가 불렀던 그 빌리 그래함 초기 전도 집회에도 많았습니다. 찰스 피니는 아예 사람의 감정을 격동시켜야만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어요. 그런 면도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 전도가 효과 있는 걸 보고 복음주의가 생겼습니다. 사영리만 전해도 복음이 전해지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런 복음주의 전도는 미국이라는 독특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육체 노동자들 중심의 고난받은 민중들, 가난과 흉년과 기근과 지진 이런 온갖 종류의 열악한 삶의 접근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그것만 하더라도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은 자기가 그 찰스 피니나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이런 운동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존 필드나 요한 웨슬리나 찰스 웨슬리처럼. 그래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직접 대중과 만나서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엄청나게 성공한 사례를 자기가 전통으로 계승했다고 하고,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의 토대가 됩니다. 즉 구두 복음만 가지고도 교회가 설립하고 사회가 바뀐다, 그래서 1906년에 웨일즈에 성령이 임해서 1907년에 한국의 평양에 성령이 임해서 사람들이 바뀌었다, 이런 것 때문에  복음이 올바른 말로 선포된 복음만 가지고도 인격이 바뀌고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거기가 복음주의가 갖는 매력이면서도 함정입니다. 즉 ‘구두 복음만 잘 증거해도 개인이 바뀌고 공동체가 새로 형성되고 주변 사회가 바뀌더라.’ 

# 존 스토트의 사회적 복음주의과 로잔언약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신학도 바로 그 복음주의의 복고적 리바이블로 통합니다.그래서 핵무기 때문에 WCC 사람들이 1940년대 핵 문제 반핵 운동을 펼치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설교 시리즈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핵을 걱정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핵 너머의 천국을 바라봐야 됩니다. 세상에 핵을 없애려고 하는 이런 어리석은 운동 이건 복음주의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정의한 복음이 한국에 지금 와 있는 복음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를 균열을 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존 스토트입니다.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대책을 수립하고 하나님의 총체적 복음에 대한 응답이 복음주의라는 조어 또는 복음주의라는 그런 게토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면서 복음 자체에 집중한 사람이 존 스토트의 사회적 복음주의입니다. 이 두 사람-빌리 그래함의 미국적 독특한 복음주의 성공 경험과 존 스토트와 같은 이런 경험-과 마틴 로이드 존스가 외지에서 보았던 이런 경험들이 합해서 1974년에 복음주의 대동단결 연맹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로잔언약입니다. 

로잔언약은 모두 15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과 랄프 윈터 같은 이들이 우리나라 선교 대회의 레전드급 올드보이들의 신학을 거의 80%가 반영합니다. 그런데 한 15% 정도가 존 스토트와 사무엘 에스코바, 르네 빠디야, 올란드 코스타스 같은 중남미 신학자들의 관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이런 15%가 집중 반영된 것이 5항과 6항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복음 전도와 동등하지 않지만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중에서도 물리적으로 우선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벤젤리즘, 구두 복음 전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 구두 복음 전도가 효력을 발휘했다는 걸 부인해서도, 구두 복음 전도가 틀렸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구두 전도만이 복음을 전하는 행위라는 것을 복음주의가 만일에 포기한다면은 로잔 언약 대회도 굉장히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로잔 언약 때는 여전히 구두 복음 전파의 우선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그 맥락의 복음 전파가 없다면 이건 로잔언약이 아닌 거죠. 

지금 어떤 광화문에 집회를 하러 왔는데 아주 명백하게 악을, 사회악을 척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피켓을 드는데 거기에다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사야 61장도 쓰고 사도행전 16장 31절을 써야 된다, 주 예수를 믿어라라고 해야만이 로잔언약에 맞는 통전적 복음 운동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그런 고난을 자초하는 행동 자체를 행위로 표현된 복음 선포로 보지 않고, 말로 꼭 그걸 추가해야만이 복음 선포로 본다하는 거죠. 로잔대회는 특수한 시대 때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부터 1800년대 후반의 웨슬레, 찰스 피니, 무디 계통의 이런 그 강렬하고 짧은 구두 선포만으로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그 과거의 경험이 지금도 맞는 거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 통전적 복음, 사회적 책임

그런데 진짜 연구를 해봐야 됩니다. 통전적 복음으로서 그런 명제를 성립시키려면 진짜 공부를 해야 됩니다. 바울만 하더라도 아무 맥락 없는 사람한테 거리에서 만나자마자 복음을 전하지 않았아요. 바울은 이스라엘 구원사를 이미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회당 출입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부터 시작해서 수리아 안디옥 회당 출입자들에게, 하나님 경영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시장과 아고라에서 스토아 철학자와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토론을 했습니다. 바울이 구약의 구원사에 전승하지 않고 바로 복음을 전할 때도 있습니다. 고린도장 4장, 17장에 보면 창조 신학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창조 신학을 이미 회중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어요. 회중에 최적화된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가 가장 성공했다고 믿는 그 짧은 구두 복음 선포, 주 예수를 구두로 영접하면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된다(하이델베르크·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고 합니다. ‘우리가 옳게 예수를 믿으면 우리 동네가 좋아지고 우리 마을이 좋아지고 생태계가 훨씬 좋아진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에서 최고의 심판에서 구원받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받을 구원을 먼 미래 체험으로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구원 받기 때문에 진짜 이 사람의 최후의 심판 법정에서 구원 받을지도 모르는 채로 구원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걸 믿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복음주의자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겁니다. 구원이 임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아직까지 최후의 법정 순간 최후 심판의 자리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원의 개인 구두 복음만 가지고도 복음이 전파되는 이런 경험을 보면서 이거야말로 우리가 힘써야 될 유일한 과업이라고 주장하는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미 1910년대에 미국총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5대 강령이 선포됐습니다. 구두 복음만 가지고도 교회가 잘 되는데 왜 사회문제까지 끌어들여서 교회를 정치적 파장 이데올로기 투쟁의 자리로 삼느냐며 많이 걱정합니다. 이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 정의를 추구한다 했을 때 가장 큰 약점은 사회 정의를 뭐라고 정리하며, 노동자의 근로 윤리가 노동 윤리가 와해된 걸 더 문제 삼을지, 경영자의 분식회기가 더 큰 문제인지 이걸 아젠다로 선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교회가 곁가지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회 정의 추구를 아예 교회에서 빼려고 하는 목사님들의 마음을 이해를 저는 합니다. 고분고분하고 이렇게 목사님의 설교에 순종적이며 헌금을 다루는 교인을 원하지 사회 문제, 6일 동안 많이 성도들을 괴롭히던 그 문제를 또 교회까지 와서 나눌 때 교회가 분열되기 참 쉽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를 이렇게 좁게 정리하고 교회 활동을 세상 바깥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그 문제를 최후의 법정 심판에서 구원받는 이 복음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일이라는 것이 목회자들은 편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좋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가 엉망진창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 책에서 개인전도 열심히 해도 사회 정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책이 로잔대회의 정신을 굉장히 잘 계승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책을 쓰고 <하나님 백성의 선교>라는 책에서는 빌리 그래함의 보수적인 입장을 충분히 반영했습니다. 이거는 1952년에 독일에서 WCC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말했을 때의 선교 개념을 최대한 성경의 근거로 지지하면서 풀어 쓴 책입니다.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 초기 선교사들에게서 해법을

이덕주 교수가 쓴 <새롭게 쓴 개종 이야기>에는 연동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에온  선교사님들은 WCC주의자들입니다.  2천 명의 해외 선교사 중에서 구두 복음만 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병원을 짓고 고아원을 하고 양로원을 하면서 모든 의료 활동, 총체적인 인간의 필요를 채우면서 감동을 시킨 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복음의 그런 스토리를 납득할만한 확장된 내러티브를 가진 채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교회 백정 박성춘입니다. 그의 아들(박서양)이 장티푸스에 걸리는데 이 사람이 고종의 시의였던 알렌의 신망을 받고 고종이 준 가마를 타고 백정집에 이 사람을 고치러 가서 살려냅니다. 이 장면을 백성들이 다 본 겁니다. 충격을 받습니다. 1894년 농민혁명의 가장 큰 아젠다가 반상 차벌인데, 그걸 누가 했습니까? 연동교회와 선교사님들이 한 겁니다. 반상 차별이 무너지자 양반 5명이. 백정과 양반의 예배석을 따로 구분해 달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그리고 양반 3명은 아예 교회도 안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님들이 1대 한국 신자들을 만들어낸 제자 양성과정을 보면 우리나라 목사 중에 선교사님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싶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에 45개월 동안 배 타고 와서 자녀들 평균 1.7명 잃고, 아이들을 1.7명 한국 땅에 묻고 피눈물 흘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 교회처럼 순수한 그런 사랑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어요. 이 복음은 구두 복음이 아니죠. 이미 함께 전하는 복음인 거죠. 이것이 제가 볼 때 예수님의 복음이고 바울의 복음인데 우리 한국은 이런 큰 백그라운드 네러티브를 조성함이 없이 목사의 개인기 또는 후배 또는 입담에만 의존하는 복음을 전하니까 설교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아니라 말 잘하는 사람들의 경연장이 됐고, 어느 사람이 재미있게 설교하는가가 교인들을 끌어가는 중요한 위닝 포인트가 되고, 상품 가치가 돼버렸습니다.

원래 이성적인 교회는 모든 주일날 설교가 똑 같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요. 이사야 61장을 읽어야죠. 누가복음 4장 18절을 읽어야 되죠. 결론적으로 우리는 복음주의가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선포가 중요한 것이죠. 하나님 아는 지식의 선포가 뭡니까? 호세야 4장 6절의 '인애'와 예레미야 9장 24절 '공평과 자비와 정의를 전파'하고, 시편 13편절 '압박당한 자를 위해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는'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거죠. 로잔이 그걸 하려고 5항에 해놨습니다. 그런데 5항이 14가지 언약 조항 때문에 지금 질식사 직전의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이걸 더 질식시키는 9월 로잔대회가 안 되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5항을 살려내고 5항이 얼마나 성경의 총체적 복음운동과 밀접하게 잇닿아 있는가를 널리 알리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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