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취급 당한 농노들을 위한 뮌쩌, 반대편에 선 루터


[종교개혁 497주년-특집(2)] 개혁의 중심에서 멀어진 루터


 

   
| 루터(위)와 루터의 부인 카트리나

때는 1525년. 루터는 그를 흠모하는 카트리나와 결혼했다. 그가 1483년생이니 그해 루터의 나이는 42살. 중년의 나이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에서 숙식하며 살아왔으나 점점 그 자신을 돌보는 가사 노동이 싫어졌다. 침대를 청결케 하고, 자신의 속옷을 빨아 입는 것도 싫었다. 그의 이중구조의 살림살이가 시간이 갈수록 싫었다. 제후들이나 왕들, 심지어 가톨릭의 주교나 대주교들마저 그를 우러러보는데 의식주 생활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이 많이 무능해 보였다. 루터의 대외적인 위상은 1천년 로마의 교황을 향해 호령하는 수준이다. 어디 교황뿐인가? 영주들, 제국의 모든 기득권자들이 루터의 비위를 맞추려고 체면불구하지 않는가.

로마의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루터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은 교황권의 불법과 부패를 규탄하고 지적하는 것 뿐 아니라 농민반란을 해결해 줄 사람이 루터뿐이기에 영주들은 루터의 눈치만을 보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자유롭지 못한 농민반란과 루터의 동지인 토마스 뮌쩌와의 관계 등 루터의 요즘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사회적 급진주의자들의 유혹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농민반란과 토마스 뮌쩌 신부와의 관계를 무조건 외면할 수 없는 루터, 그의 개혁자로의 인생 후반전에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는 것들과 어찌 자신이 무관한가?

   
| 멜랑히톤

농민반란의 산발적 시도는 1476년경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서였으나 루터의 교황권 비판, 성경의 우위성, 크리스천의 자유를 선포한 그의 논문, 그리고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그동안 산발적인 소요로 이어왔으나 이제는 루터라는 거대한 실력자가 나섰으니, 독일 농노들은 살 길을 얻은 것이었다.

중세의 독일 농민들은 한 마리 가축에 지나지 않았고, 그냥 노예일 뿐인 그들에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그리고 스스로 혼자만의 요구에 따라서도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선언, 농노들도 사람노릇 하라는 것이다. 농노들은 루터가 그들을 버리지만 않으면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는 교황과 영주들을 선택하고 농민반란 세력을 제압해 버렸다는 평가를 수용해야 할 형편이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루터는 브룩스 회의장에서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자기를 상당히 우호적으로 대했음을 떠올려 본다. 루터는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기변호에 자신감이 없었다. 첫날은 그랬다. 평생 이토록 웅장하고 큰 장소에서 황제와 교황권 특사, 대주교, 주교, 선제후들, 후작, 백작 등 당대의 최고 권력자와 그 보좌권력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루터는 떨렸다. 자기가 쓴 책 25권을 앞에 놓고, ‘당신이 버려도 될 책 또는 지켜야 할 책을 설명하라’고 했을 때는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교황을 비난하기라도 한 책들을 버릴 수 없다 하면 자기는 죽고 망하게 되어 있었다.

   
| 에라스무스

한순간 루터는 ‘내게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이 요구를 바로 카를 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흔쾌히 허락했었다. 다음날 재판장에 나온 루터는 하루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심문관이 자기 책들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에 대해 답변하는 루터의 목소리는 어제와 전혀 딴판이었다.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는 단순한 진리소개의 도서이니 없앨 필요가 없을 것이고, 둘째는 교황권의 부패와 권력 남용은 물론 독일의 국가 재정을 도둑질하는 것을 지적한 책이니 포기할 수 없다. 나머지 셋째는 교황주의자들, 곧 나의 적대자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책으로서 결코 없앨 수 없다 하였다.

   
| 토마스 뮌쩌

찬반 세력들, 특히 루터를 죽이려는 세력들이 거세게 나왔으나 루터는 끝으로 한마디,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하고는 입을 닫았다.
황제는 사전에 약속한대로 황제의 이름으로 루터의 ‘안전 통행증’을 발행했다. 이날은 1521년 4월 17일이다. 이 순간부터 비텐베르크 이단자 마르틴 루터는 영웅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 세력은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다. 루터는 당시 당대의 최고 실력자인 에라스무스가 그에게 종교개혁의 동반자가 되자고 했으나 그는 에라스무스를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루터 자신보다 14살이 어린 멜랑히톤이 루터를 찾아왔다. 멜랑히톤은 성경해석을 위한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하니 그가 루터의 약점을 보완하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루터 주변에는 실력자들이 모여들었다. 루터는 기세를 올렸다. 크리스천의 자유를 말하고, 만인제사장설을 선언하여 종교와 사회현실 속에 짓눌려서 살아온 민중들의 혼을 일깨웠다.
먼저 만인제사설은 교황이나 신부들의 도움 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 스스로가 제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하여 독일과 유럽 전체를 향한 새 시대 선언이 되게 했다. 이제까지 영주들의 노예로 짐승처럼 살아왔던 농노들이 일어났다. 1490년대에는 산발적이던 이 아름다운 인간선언은 종교개혁 차원에서 로마 교황과 적정선에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멈추려했던 마르틴 루터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짐이 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루터가 농민반란군 세력을 위해서 도움을 주었다. 그 증거는 루터와 토마스 뮌쩌와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된다. 그러나 루터와 토마스 뮌쩌와의 관계 자료는 서로 다르다.
루터에게 보름스 재판 후 신변보호가 되는 ‘통행증’을 발행해 준 카를 5세의 개인적 성격, 또는 스페인의 종교개혁자 라스카사스와 카를 5세의 관계를 보면 우리는 루터의 개혁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라스카사스 신부는 콜럼버스의 탐험대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에스파냐 제국에게 부를 안겨준 시대에 활동한 개혁자이며 카를 5세 황제의 ‘전속사제’로서 개혁자의 이름으로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황제는 보름스 재판 과정에서 루터의 성격과 그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보면서 라스카사스 신부를 떠올렸을 것이다. 황제는 라스카사스 신부를 통해서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현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때 루터와 토마스 뮌쩌의 영향력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관계에 있어 라스카사스는 뮌쩌가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루터에게 복덩이가 되었다가 지금은 혹덩이가 된 토마스 뮌쩌는 농민군 깊숙한 곳에 있고, 루터는 발을 빼려고 몸부림친다. 이는 영주들의 요구요, 영주들의 요구는 가톨릭의 요구일 수도 있는 것이 당대의 현실이었다. 루터는 농민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이는 당시 종교개혁 진영과 로마 가톨릭을 끼고 있는 제후 (또는 영주)들에게 농민군은 공동의 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농민군은 무기도 변변치 않고 지위체계도 열악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지속적으로 싸워나갈 힘도 없었다.

루터는 계속해서 독일 남서부로 번져가는 농민군에게 ‘폭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의 폭도들인 농민군은 주교들의 궁전으로, 또 제후(영주)들의 성채로 가서 불을 지르고 파괴했다. 루터는 몸이 달았다. 루터는 만약에 농민군이 종교개혁 세력의 교회들까지 공격하게 되면 유럽의 기독교(신교) 또한 전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상황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떻게 보면 농민군을 학대하는 것은 제후들이나 가톨릭 주교들보다 루터가 더 심했다는 당시 주변의 평도 있다. 처음에는 루터 자신이 공감했다가 귀족들, 주교들과 함께 루터의 지지 교회들도 가진 자의 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농민군을 향해 교회개혁을 가로막는 원수들, 악의 종자들, 깡그리 소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삼아 모두 죽이는 데 앞장섰다. 1525년 5월 25일(어떤 자료는 7월 25일)에 농민군은 모두 형장에서, 화형장에서 죽어갔다. 대략 15만여 명으로 자료들은 말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루터의 친구인 토마스 뮌쩌도 불더미 속에서 죽어갔다. 당시 루터는 물론 뮌쩌나 개혁자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1세기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 부분과 ‘만인제사의 신학적 과제’ 그리고 농민반란을 ‘거룩한 혁명적 개혁 세력’으로 방향을 잡아나가기에는 역시 루터보다 더 큰 인물을 필요로 할 것이다.

조효근 목사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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