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종교개혁 496주년 본지 지령 1500호 - 대속

“가장 나중에 불려간 포도원 일꾼”

배 동 석 피택장로 (53)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대속 신앙에 대해 교리만으로 이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해야만 한다”는 식의 교리 이해를 통해서 율법적으로 이 내용을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하면서 대속의 신앙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이 대속 신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이끈 말씀입니다. 어느 날 이 말씀을 읽고 바로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장 나중에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일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길거리에서 일자리가 없어 서성이면서 헛되고 의미 없는 방랑자로 살 수밖에 없는 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뒤 늦게 포도원에 불려 들어가 먼저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멋진 일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마치 아침 일찍에 포도원에 불려 들어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모태신앙인으로 살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을 바라 볼때 비판하고 판단하고 나보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이니 나보다 못하다는 비교의식으로 살았습니다. 율법적이고 규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나중에 포도원에 불림을 받은 일꾼이며 일한 분량에 비해서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대속의 신앙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대속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사명이라고 배웠고 또 그리해야 하는데, 실제로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상을 바라 볼 때 긍휼의 마음을 갖기보다는 비판·판단·정죄하기를 너무 쉽게 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대속을 받기는 했나, 대속의 은총을 경험하기는 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깊은 묵상과 독서(거룩한 책읽기, 렉치오 디비나)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추스르곤 합니다. 반드시 기독교적인 주제의 책만은 아닙니다. 얼마 전 들소리신문에서 발간했던 〈구절초〉(조윤숙 지음)라는 소설도 저의 거룩한 책 읽기 목록에 포함된 책이었습니다.

대속 받은 자로서의 삶,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내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속의 은총, 나를 나답게 하는 본질”

김 남 석 목사 (36)

 

내게 있어 대속의 은총은 주님께서 내게 찾아오신 초등학교 6학년 늦가을 때였습니다. 가난했기에 나보다 부자인 다른 사람의 것을 몰래 가져와도 죄가 아니라고 합리화 했습니다. 그리고 신도 없다고 여기고 인간의 처음과 끝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절, 같은 불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왜 어머니도 교회에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셨음-에 이끌려 처음 교회에 갔습니다.

그 후 거부할 수 없는 그분께 붙잡히고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정한 해방과 새로운 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만이 전부인 것을 깨닫게 됨으로 영적 혜안을 선물 받아 가치관과 인생의 방향이 설정됨으로 오늘까지 대속의 은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속의 은총을 받았지만 삶에서 구현이 안 될 때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에게… 그러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말씀연구와 기도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아우르고 계시는 주님의 은총을 확인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은총은 나를 세워나가는데, 그리고 나를 나답게 하는 본질이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게 찾아오게 될, 그리고 시시때때로 나를 엄습하는 가장 무서운 죽음 앞에서도 큰소리칠 수 있는 당당함은 대속의 은혜 때문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1년 전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도 슬픔의 족쇄를 풀어 제키고 역설적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도 대속의 은총을 받은 어머니와 제가 감히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대속의 도상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항시 말씀의 본질을 잊고 세상의 철학이 교회에 들어오면 기독교는 왜곡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의 철학이 교회를 잠식해 가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역시 믿음의 결과를 구원보다는 돈으로 보상받으려는 잘못된 신앙이 팽배해 있습니다. 회복의 길은 교회가 대속의 은혜를 바르게 정립하여 그것만 말하고 전할 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과 내 속에 대속의 힘은 무한히 존재”

김 경 순 씨 (38)

 

대속이란 더 큰 모습으로 원래대로(하나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최초의 작은 점에서 출발한 우주(빅뱅, 하나님의 우주창조 역사의 시작점)가 시간이 지나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눠지고 더 구체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로 연결되어 더 큰 우주로 확대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속의 의미를 인류역사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대속을 깊이 이해할수록 ‘내가 지금 여기서 이것을 해도 되는가?’라는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났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예전만큼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보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것, 성경책보다 잡다한 인간의 역사서와 인터넷 기사를 읽고 느끼는 것, 정신적 성장보다 육체의 건강에 더 구체적으로 투자하는 것,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나와 내 가족들을 더 챙기는 것 등 이런 나의 모습들을 이제 편안함으로 바라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큰 역사 속의 한 부분이며 이런 내 모습을 그분 또한 편안하게 바라보고 계신다는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신만큼 육체도 중요하며 육체가 건강해야 정신도 더욱 건강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하다보면 어느새 보이지 않는 부분에까지 더 충실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속자로서의 삶을 위해 나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 강요하지 않고 되도록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과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 수 있는 나 자신을 기대합니다.

삶에서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때는 우선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노력해서 안 될 때는 지나치게 애쓰지 않습니다.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한 긴 역사 속에서 먼지 정도 안 되는 나의 작은 일들에도 우주만큼 큰 하나님의 섭리가 적용되어 때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더 잘 정리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미 이 세상과 우리 자신 속에 대속의 힘은 무한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대속의 힘을 느끼는 강도는 각자의 몫, 더 많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된다고 봅니다. 특히 리더(목회자, 교육자)들의 깊은 고민과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익한 자가 얻는 은혜”

김 영 복 전도사 (42)

 

저는 27살 때 말씀을 통해 정확히 대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믿음으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내 모습과 행위를 보면서 늘 죄의식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을 통해 내 모습과 상관없이 예수의 피로 내 죄가 흰 눈과 같이 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행위와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완벽히 씻으셨고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음에 믿음으로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내 마음의 죄가 흰 눈과 같이 씻어졌고 내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대속의 은혜를 입은 후 제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할 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온전히 씻으신 능력이 있으시며 죄와 함께 할 수 없는 능력이 계십니다. 대속의 은혜를 입은 후 내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죄를 멀리 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보면 내 생각은 죄에 적용을 받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영의 생각이 육의 생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때론 내 생각에 붙잡혀 믿음의 삶을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입고도 마음의 위치가 높아지면 자신을 믿게 됩니다. 자신을 믿으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붙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히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해주십니다. 마음을 낮추기 위해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생각에서 풀려납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말씀 앞에 자신의 마음이 정확히 인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무익한 자의 위치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정확히 일을 하게 됩니다. 그 것이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는 절망에서 발견”

김 승 호 목사 (44)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내가 죄에서 완전히 속죄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나 자신을 볼 때 백번 생각해도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속이 아니고는 구원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100% 믿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내가 대속 받았다는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대속자로서 살고는 있지만 자범죄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원죄에 대한 죄의식은 없습니다. 그것은 관념적으로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끗이 처리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범죄 속에서 자라나는 죄책은 순간순간 느끼고 있습니다. 아울러 구원받은 내 자신이 주님을 다시 욕보이는 모습을 볼 때 내가 구원에서 멀어진 상태는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히 6:4~6).
또 야고보서를 바탕으로 내 믿음이 완전한 믿음인가? 지식적인, 시변적인 믿음에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엎드려 절했던 귀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막 3:11) 이 믿음의 상태에서 내가 온전히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 등의 생각들을 해봅니다.

대속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 어려울 때는 예수 보혈을 의지해서 회개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말씀들을 묵상합니다(사 1:18, 요일 1:9).

삶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대속의 은혜가 큰 힘이 됩니다. 특히 구약시대에 죄를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을 사용하신 하나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사람 죽인 바울을 사용하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속의 은혜가 아니면 그들을 용서하시고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롬 8:4절 말씀이 육신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용서와 자유함의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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