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종교개혁 496주년 본지 지령 1500호 - 대속

신학자에게 묻다 / 이 정 배 교수(감신대학교)

바티칸 공의회 50주년 ‘교회가 복음화 되지 않으면 세상의 복음화 어림없다’
예수, 바울, 종교개혁가 등 모두 ‘편안한 삶’ 포기 “대속적 화해에 뛰어들라”

 

△우선 종교개혁 496주년을 맞이하는 소회부터 한 말씀 해달라.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은혜·성경 등 세 가지 원리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부패상에서 출발됐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측면에서만 수백 년 동안 보아왔다. 그러면서 가톨릭은 아주 나쁜 종교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점으로 가톨릭은 상당히 변화했고 달라졌다. 그리고 그런 노력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종교개혁이 가톨릭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변화시켜서 엄청나게 일어난 대응종교개혁의 실상을 우리가 알고 무지를 깨우쳐야 한다.”

△가톨릭의 대응종교개혁이란 어떤 것인가.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 흐름이 있었다. 가톨릭 안에서도 교황 무오설,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근대에 맞게 갱신하려는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종교개혁 시기를 알려면 우리 종교개혁과 함께 가톨릭 종교개혁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가톨릭에 대한 시각이 그 당시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가톨릭의 결정적 변화는 제2바티칸 공의회인데, 그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그동안의 잘못된 것, 즉 갈릴레이를 처형한 것이나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 등에 대해 뉘우치고 1963년 쇄신안을 내놓았었다. 가톨릭이 올해 그 공의회 50주년을 맞아 기념하면서 천명한 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교회가 복음화 되지 않으면 세상의 복음화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복음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없으면 요원하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가톨릭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자기 부끄러움을 표출한 것을 들으니 참으로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리고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저마다 그 개혁 가지고는 안된다고 보았다. 토마스 뮌처, 아나뱁티스트, 퀘이커 등은 루터 종교개혁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사적으로도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런 부분을 기독교 주류에서는 주목을 하지 않았다.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루터파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와 본 회퍼는 ‘루터가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오직 믿음으로 라는 말을 안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비판했다. 본 회퍼는 히틀러를 제2의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에 항거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의 친교장처럼 되어버린 덴마크의 교회를 비판했다. 오직 믿음으로 안된다는 말을 벌써 그때도 했다.

성경 어디에 행위는 아니고 믿음으로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는 비판이었다. 요즘 학계에(교회들이 싫어하는데) 역사적인 예수연구들을 많이 한다. 그들의 업적을 보면 아주 래디컬한 이들과 기존 교회와 연결고리를 갖고 연구하는 두 부류가 있다. 나도 래디컬한 역사 예수연구는 싫어하지만‘온건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다. 삶이 없는 부활은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을 대속적인 개념으로만 읽었는데, 바울은 대속론 위에 화해론을 이룬 자라는 것이다. 그 당시 바울 시각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유대인과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은 자들과 관계,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된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제대로 이해시켜 하나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고, 그것은 대속 안에서의 화해론을 강조한 것이었다.

바울의 속죄론은 우리 죄를 대속한 것만이 아닌 끊임없이 주님(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기 위한 참여적인 속죄론이다. 당장 구원받고 딴 세상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해결해야 하는 화해의 길에 우리가 삶을 통해 참여해야 하는 속죄론이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구원, 속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교회들이 고백해 온 것 위에 알아야 할 중요한 의미는 그 당시 로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로마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평등해야 했기 때문에 로마의 가치관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종을 부리는 것은 당시 당연했지만 기독인은 평등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종 부리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로마서를 로마에 전달해 주는 이도 여인이었다(바울 동역자 16명 중 9명). 바울의 대속신앙은 그 당시 크리스천들이 누리고 있는 삶에서 떠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겠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우리시대는 로마시대가 아니지만 자본주의시대다. 교회조차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바울은 그 체험을 기점으로 유대인과 헬라주의의 특권을 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다가가 복음을 전했다. 대속은 참여적인 대속이다. 내 영혼만 구원받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지속적인 화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과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루터의 만인제사론은 한국교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그 정신은 희박하다.
-“그렇다. 그런데 루터의 한계도 있었다. 성직자나 성도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직업적인 소명을 받은 것이라는 원칙 하에 백정에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백정은 백정 일만 하다가 죽으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농민혁명을 루터는 거부했다. 오늘의 시대에 이 의미를 생각하면, 목회자는 성직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하고, 평신도는 일상에서 목회자라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가 외쳤던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은 한국교회에서 과도하게 사용되었는데 만인제사는 제대로 시작도 못해 본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 속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
-“믿음이 율법화 돼서 그렇다. 대속 체험은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것인가. 그것을 ‘믿습니까, 아멘?’ 하면서 믿으라고 종용하니 믿고 싶기는 한데, 믿어지지는 않고,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시늉을 한다. 붓글씨 쓰는 법은 탁월하게 아는데, 붓글씨 쓰기 위해 한 획도 긋지 못하는 양상과 같다. 옛날에 어거스틴이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데 뭘 사랑하라는 것이냐’고. 현대 신학자들은 그 대답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그 당시 율법시대에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지 않았나.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오나 밤에 오나 일하는 품삯이 같은 것,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해 잔치를 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가능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기독교를 보면서 희망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현재 미자립교회가 상당수다. 신학생들은 신학교 유지를 위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출되는 신학생들 70, 80프로는 영원한 비정규직이고 나머지는 세습과 아부, 아첨을 통해 자존감을 버리면서 담임목사의 직에 오르고 있다. 참으로 암담하다. 그러나 농촌에 가보면, 제자들이 목회하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신이 믿음 없이 살았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만큼 그들은 치열하고 바르게 목회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작지만 본질을 잃지 않고 각자의 특성을 살려 교회 공동체를 이뤄내고 있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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