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살다, 공동체를 열망하다 (1)-김명현 목사

“유엔 아동권리협약에는 2019년 기준으로 196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아동을 보육원과 같은 시설에서 양육하는 것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불법이거나 불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빈곤국가에 가서 보육원을 세운다면
 
그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일반대학을 다니던 필자가 목회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80년대, 구로공단에서 노동을 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여공들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해 겨울방학, 야학을 부탁하던 전도사님의 말씀에 솔깃해 어린 여공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나를 놀라게 한 두 아이가 있었다. 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나이의 소녀들이었다. 두 아이는 집을 나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던 ‘소녀가장’들이었다.

‘소년소녀가장.’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소년소녀가장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1989년 11월 2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아동권리협약’을 한국이 1991년에 비준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1999년 9월 7일에 제정해 2000년 10월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모든 국민의 기초생활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소년소녀가장’을 제도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사라지도록 한 것이다.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국가라면 아동을 보호자 없이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아동의 보호자는 누가 될까? 우선은 조부모나 친인척이 보호자가 된다. 이런 가정을 조손가정, 친인척위탁가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마저도 보호자로 위탁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웃’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 정확하게는 시설의 장 또는 종사자가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시설을 아예 없애고 자원하는 시민을 아동의 보호자로 위탁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을 ‘일반위탁정’이라고 하는데, 24시간 돌보아야 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전문위탁가정’을 둠으로써 모든 아동들이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보호받도록 하고 있다. 반면 일본과 한국은 ‘그룹홈’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을 준수하려는 꼼수다. 혈연중심의 가족 관념이 강한 이 두 나라는 기존의 ‘보육시설’을 쪼개거나 소규모 ‘보육시설’에서 아동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이 협약을 우회한 것이다. 시민의 공동체적 연대와 사랑, 책임의식이 부족한 탓이다.

구로공단에서 ‘소녀가장’을 만난 후 20년이 지났을 무렵,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한 남매를 만났다. 이들 역시 같은 나이 또래인, 곧 중학생이 되는 오빠와 6학년이 되는 여동생이었다. 보호자가 될 친인척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앞서 말한 ‘그룹홈’을 중심으로 해결해 왔다. 오빠와 여동생은 각각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그룹홈’으로 흩어져 수용될 것이다. 가족과 친척 등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18세가 될 때까지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지내게 된다. 우리 교회는 이 남매를 국가가 제도를 통해 강제적이며 폭력적으로(?) 처리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기꺼이 그 남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제도가 아닌 ‘이웃’은 그들을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한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동은 생명을 존중받아야 하며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 2016년, 유엔의 ‘아동인권협약’의 내용을 포함하여 보건복지부가 수정 발표한 ‘아동권리헌장’의 첫 번째 조항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위탁부모 대신 ‘그룹홈’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많다. 현재는 ‘그룹홈’에서 ‘공동생활가정’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부모가 돌봐줄 수 없는 아이들이 (복지)‘시설’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서구 사회에 ‘그룹홈’이 없는 이유는 위기 아동들이 소수여서가 아니라, 기꺼이 이들의 보호자가 되려는 이웃이 많기 때문이다. 여전히 매우 적지만, 우리 사회에도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맞아들여 보호자가 되어주는 이웃들이 있다. 이들은 더불어 사는 삶을 생각하는 이들이며,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조건 없는 사랑을 지닌 이들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와 책임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은 모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필자의 경험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80년대 어린 여공들이 기숙사비를 내고 머물렀던 곳은 교회 장로가 운영하던 ‘미혼모를 위한 시설’이었다. 여공들에게 돈을 받고 기숙사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미혼모로 둔갑시켜 재봉을 가르친다며 정부에 보고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짐작해 보기 바란다. 10여 년 전, 남편의 학대로 이혼하고 신앙생활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이주여성이 학대후유증 때문에 수술 받는 일주일 남짓 동안 그녀의 어린 남매를 돌봐준 적이 있다. 이 여성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수술을 주선한 사회복지사의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늘 사랑을 외쳐대지만, 가정을 잃은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주는 것을 힘들어 한다. 단 일주일도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사랑과 보호를 원하며 찾아 온 아이들을 ‘아동보호전문기관’이나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자신들의 일을 다 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끝으로 시야를 조금 더 넓혀 보자. 유엔 아동권리협약에는 2019년 기준으로 196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아동을 보육원과 같은 시설에서 양육하는 것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불법이거나 불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빈곤국가에 가서 보육원을 세운다면 그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여러분은 해외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선교사가 세운 보육원의 많은 아이들이 부르는 찬양과 율동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현장을 -없을 것이라 믿지만- 방문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은 당사국이 금지한 불법의 현장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아동들을 보면서 흘리는 슬픔과 분노의 눈물이어야 한다.

선한목자교회 담임 김명현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김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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