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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패스러운 말을 한 번 해 보자. 신자들, 특히 목회자들과 대화할 때면 어떤 착각을 느낄 때가 있다. 신자들은 언제나 성경말씀과 만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마치 자기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인용하고 활용하여 자기 이론을 펴가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자기보호용 도구로 서슴없이 활용하는데, 바로 거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거짓과 위선이다. 심한 경우는 더 큰 범죄가 조성된다. 이는 무섭고 놀라운 일로써 신자된 도리를 잘 배워가면서 하나님의 말씀(가르침, 교훈, 진리)이 언제나 신자인 내게 자유로운 접근 상대인지에 대하여 치밀한
22세기 대안
2007.10.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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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북한에 다녀왔다. 대화가 되는 듯, 가능성이 보이는 듯 했으나 역시 불신의 벽은 높았다. 60년이 넘도록 분단, 손바닥 만큼한 땅덩이(나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이지만 여기서 한 번 사용했다)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반도, 대한민국은 그것마저도 지탱할 힘이 없었다. 새 시대 국사학자들을 통하여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를 우리는 요즘 확인하고 있듯이 한 시대 우리 선조들은 지금의 땅(영토)보다 10배 이상을 가지고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의 강자였던 나라를 지켜냈었다. 남북정상 회담을 살펴보니, 북한 권력은 김정일
22세기 대안
2007.10.1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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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앞에 제시한 ‘절대가???대하여 다시 공부해야 한다. 예수께서 타종교나 문화와 충돌할 때 그들과 싸우고, 자기 해명 또는 변명을 하고, 상대의 견해를 멸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자(사도)시대를 건너기도 전에 타(他)에 대하여 지나치게 견제하고 자기 옳음을 몸으로 하지 않고 입으로 변명하다가 시비를 불렀고 독선과 오만의 집단으로 한 등급 위신이 추락했다. 기독교는 절대가치인 ‘하나님의 인간화’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사람되심의 가치는 상대(세속) 세계의 관념(기준)이 아니다. 상대가치란 내가 이
22세기 대안
2007.10.0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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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역사의 방향을 수정하라-19세기 유럽의 기독교는 소위 오리엔탈리즘 식 퇴행을 거듭하는 기독교였다. 한편으로는 19세기식 복음주의의 화려한 선교열정을 높이 살만큼이었으나 역시 그래도 그들은 아시아를 열등지대로 생각하고 거침없는 식민지배를 행사하던 폭군들이었다.영^프랑스^미국 등 뒤늦게 선진국 대열에 끼어든 일본제국주의까지도 중국과 대한제국,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점령군의 칼을 휘두르며 식민지배를 구체화 하였다.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의 논리에 대응하여 옥시덴탈리즘(Oceidentalism)으로 반(反)서양주의의 기원을
22세기 대안
2007.09.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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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크게 한번 테스트해 보셨다. 잘했으면 세계기독교 역사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좋은 기회였는데 놓쳤다. 그리고, 점수는 낙제점이다.세상에 1천만 신자라고 큰소리는 잘 치더니 막상 어려움이 닥치니 모두들 `강건너 불구경꾼들'이었다.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식으로 하면 `그놈의' 교파주의, 개인주의 때문에 온 세상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왜, 선교하려고 갔으면서 거짓말을 하는가? 그리고 진정한 주최측이 어디인가? 박은조 목사 말고 진짜 책임질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사람은 아직까지
22세기 대안
2007.09.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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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보았다. 그날로부터 먼 아득한 날 뒤인 오늘도 그 말씀이 유효하다면 어찌될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상, 더는 하나님의 절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그의 견해대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전쟁)이 된다면 지구인 절반은 타격을 받을터인데 누가 그의 이론에 동의하겠나. 하나님의 섭리는 헌팅턴 생각과는 다르다.
22세기 대안
2007.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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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저 착한 23명을 더는 비참하게 하지 마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게 한국교회 신자 23명이 납치되어 한 달이 지난 이 시간 한국교회는 자신의 비겁함과 무지를 크게 부끄러워하며 지금이라도 잘못되어버린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회가 왜, 이렇게 비겁한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라고 예수는 `현재 완료형'으로 신자의 부활을 말씀하셨다(요 11:25). 그런데,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비겁했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슬람은 비겁자,
22세기 대안
2007.08.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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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 탈레반의 한국인 피랍 사건이 서서히 가닥을 잡아가고 있어서 마음 부담을 줄여가면서, 한국교회의 `이슬람권 선교'에 대하여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슬람권 선교를 포기할 수는 없으나 금번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충분한 준비의 필요성이다. 금번 의료팀 피랍이후 그들의 가족이나 교회, 특히 한국교계의 반응이나 대응을 볼 때 실망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당사자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피랍자들의 신앙자세는 평가하기가 쉽지 않으나 그들이 출석하는 교회나
22세기 대안
2007.08.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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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지역, 미전도지역에서 해제시켜야 이방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연민하는 마음은 아라비아 또한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사마리아를 부르심이 곧 아라비아 사랑이기도 했었다. 기록상으로 감추어진 부분들일지라도 말씀의 행간들, 성경을 읽을 때 말씀들 사이에 빈 공간에 기록 아닌 기록으로 써 있는 언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거기 빈 공간의 언어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할 수 밖에 없어서이다. 주 예수는 사랑이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22세기 대안
2007.08.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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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신지 2천년이 지났다. 많은 인간들이 예수를 하나님이시며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의 본성(本性)의 일치를 이루신 분으로 믿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자들 중에도 절대 다수가 유사(비슷한) 기독교인들인지라 하나님의 처지가 매우 안타까우시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기독교의 이름으로 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기독교의 정통성을 놓고 시비하고 있으나 그 기준은 간단하다. 어느 쪽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죄의 신앙에 철저한가가 가늠자가 되어있다. 눈에 훤히 보일
22세기 대안
2007.07.2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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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이제, 드디어 한단계 스스로를 높이라. 우선 세상에 태어나면 말부터 배우듯이 영의 언어, 종교 그 이상의 언어인 ‘말 아닌 말’부터 배우는 훈련(수련)을 해야 한다.지난 7월 8일 상암 체육관에서 성령 100주년 행사가 있었다. 그때 설교자는 분명히 말했다. 그 말들을 요약하면 쓸데 없는 말, 진실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는 식의 표현으로 설교의 앞 부분을 꺼내 들었다.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으로 해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설교가 잘못한 것이 있었던 미숙한 설교자임을 깨달았다면 그는 즉시 설교행위를 중단해야
22세기 대안
2007.07.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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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본 이슬람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책 한 권을 냈다. 기독교에게 있어서 이슬람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는 50년 가까운 과제였다. 어떤 사람의 경우 이런 때에 하는 말로 덥석 `화두'라는 용어를 동원하는데 불교용어 `화두' 어쩌구 하는 말 쉽게 빌려오지 않음이 좋다. 물론 불교는 한국사 위에 1600여 년 전에 등장한 종교이니 불교 전문용어가 한국인의 일상은 물론 기독교 안에도 많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화두'라는 표현은 불교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기독교의 표현으로는 유일한 그것, 오직 그것, 오직 하나, 단 하나의
22세기 대안
2007.07.1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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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셋이 모였으니 떼도둑이다. 요즘 〈이슬람 진실〉을 한 권 집필하여 제작 단계 들어서면서 생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예수님의 원형’이 파손되었다는 생각이다. 예수의 몸체를 손상시켰다. 세 토막을 내서 도둑들이 가져갔다. 그 도둑 하나는 기독교, 또 하나는 이슬람, 나머지 하나는 유대교다. 세 종파가 각각 자기들 맘에 드는 부분을 토막내서 가져가 버렸다. 기독교는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라 하여 예수의 가슴과 머리통을 가져갔고, 이슬람은 역사와 전통에 있어서는 누가 우리를 따르랴 하면서 예수의 두 다리와 하체를 가져갔으며, 유대
22세기 대안
2007.06.2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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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라는 함정이 천국의 출입구까지 위태롭게 한다. 요즘의 교회동향을 바라보면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욕구에 혈안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신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재난과 고통은 물론 불신앙과 사단의 사슬에 묶여 고통하는 자들이 속박에서 놓여나는 것이야 백 번 천 번 바라는 바이기는 하나, 신자 한 사람 생겨나는 것을 ‘숫자’의 기쁨으로만 치부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허탈한 마음일 때가 많다. 때로는 예수의 품속에서도 외롭고 부담스러워야 한다. 외롭다는 것은 그 품이라 하나 그곳이 천하를 담는 그릇은 아니야, 하나님이신 예수 곧
22세기 대안
2007.06.1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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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 본다. 주 예수를 만나, 그분이 나를 붙잡아 함께 해 오시는 날 동안 최선의 날들을 살아왔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주 예수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던 19살 그날부터 내 개인의 삶은 없었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주간 중국 서안과 난주에 머물면서 실크로드 시대를 탐구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의 제자 알로펜이 정관 9년(AD 635년) 당태종의 정중한 영접을 받아 대당 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네스토리안 1,000
22세기 대안
2007.06.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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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요. 본디 어려움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는 사실상 아담때부터, 하나님의 완전을 희망했지요. 그날 이후,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서야 수천년 만에 틈새가 약간 뚫렸어요. 그러나 그 틈새의 절반 쯤 밖에 뚫리지 않아서 예수님의 책망을 단단히 듣는다. 예수의 추궁 하나를 여기에 옮겨 볼까?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 8:17~18). 매우
22세기 대안
2007.05.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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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직해서 좋소! 히브리어를 모른다는 말이 맞지요. 히브리어를 모르기에 구약성경은 없어도 괜찮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으며, 구약은 모세의 율법이 지배하는 듯이 말하고, 구약의 부작용이 겨우 `10의 1조' 문제인양 말하는 수준은 구약을 모르고, 구약을 모르면 신약을 모른다. 그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히브리어를 말하니까, 문자로 히브리어를 모르면 구약을 모른다고 설자가 말하는 줄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히브리어를 모른다'는 말은 히브리 사상(정신)을 모른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22세기 대안
2007.05.2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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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광주 진월교회 창립 62주년 기념행사로 ‘요한복음 특강’을 가졌다. 여러 교회에서 70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오후시간은 상당수 떠나고 절반 쯤 남아서 오후 4시까지 강좌를 계속했다. 그날의 핵심은 요한복음 6장, 예수의 말씀 가운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지? 하시는 말씀에 이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요 6:60) 한 것과 모두 떠나버리는 쓸쓸한
22세기 대안
2007.05.1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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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예수께서 고기잡이 시절로 돌아간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로 가셨다.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예수께서 버리고 떠나간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3년을 하루같이 가르친 제자들인데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보고 낙심하여 옛 직업으로 되돌아가버린 것이다. 어느 누군들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십자가의 죽으시는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신 것일까? 그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교사이시다. 그의 인품, 그 권능, 그리고 생명을 무한한 사랑의 힘으로 감싸시는 너그러움을
22세기 대안
2007.05.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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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부활체’ 안에서 우리 자신 발견 부활체(復活體)를 말한다. 부활체는 풀어 쓰면 부활의 첫 열매로 안식 후 첫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의 `부활하신 몸'이 `부활체'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는 부활신앙으로 기적을 입은 기독교 신자들, 베드로와 그 제자들, 그리고 오늘의 믿는 우리들과 생명의 연대, 또는 연합체와도 동일체가 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까지는 ‘독생자’의 자격이었으나 부활 이후에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하나님 아들이시다. 두 번째 이후의 ‘부활체’들이 연속해서 이어져가면서 이 땅을 주와 그
22세기 대안
2007.04.16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