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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구분하는 무지(無知)를 범하면서 기독교는 돌이키기 어려운 파국으로 떠밀려간다. 크고 작은 것의 구분은 일체감 상실로 볼 수도 있고, 상호관계의 파괴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이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의 실체이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몸'이라고 한다. '하나'가 아니라 '한 존재'이다. 그리고 존엄이고 지엄함이다. 이는 교회역사가 짧은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세계교회가 빠져있는 함정이다. 1517년 10월 31일로 기록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 이후 기독교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10.2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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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시간은 2천년 전과 오늘의 시간에 동시에 머물고 있다. 예루살렘 신전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시며 울부짖는 예수의 시간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채찍의 두려움은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만 느끼는 고통이 아니다. 조금 더 뜻이 있는 자들과 함께 느끼는 '정지된 시간'의 아픔이기도 하다.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했는가? 누가 예수의 가는 길을 막아서서 훼방하는가? 예수는 끝없이 울부짖으면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매질을 계속하고 계신다.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향하여 채찍을 휘두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10.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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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기 현상은 하나님이 '솔로몬 성전종교를 폐기'하셨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화답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깊은 하나님의 계시를 외면한 채 맹목적 예루살렘 귀환, 하나님이 폐기하신 성전복원을 시도하는 반역으로 도래한 메시아 출현기를 놓치고 말았다.그 결과, 메시아 강림은 5백여년간 뒤로 미루어진 채 '유대교'의 이름으로 주변 강대국의 노예가 되어 겨우 야훼 종교의 명맥을 유지했다.뜻으로 해석할 때 지금 21세기의 이 시간까지 예루살렘 성전, 사실상 신전으로 표현해야 할 그곳에 서 계신 예수는 자기 백성의 배신과 무지를 꾸짖고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10.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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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내 기도 시간에 가까이 오사 나를 지켜보시던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듯 멈칫거리시더니 내 어깨를 살포시 매만지신다.“주여,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그래, 그렇구나.”“그럼, 말씀을 해 주소서.”“그렇긴 하다만 내 말을 들은 후 네가 고통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기에 잠시 망설였구나.내 백성이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미신과 광신에 빠져서 나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주여, 주여를 외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하다.”더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한 번 내 등을 토닥여 주신다.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배신의 출처
22세기 대안
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9.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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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의 대원칙을 따라, 종교지상 시대를 극복하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해오는 중 지난해 말부터는 '우군관리' 차원에서 '독자 찾기'에 착수했다. 3만 명 정도 되는 독자들 중 이른바 실명독자, 즉 구독료를 내는 독자 중심으로 들소리 선교운동의 외곽라인을 생각하고 있다.요즘 독자관리부 활동보고를 받으면 한 사람이 하루에 80명 정도와 통화를 한다. 그중에서 구독자 당사자와 통화를 하는 인원이 평균 50여 명, 나머지는 사무원, 사모, 자녀들이다. 본인이 아닐 경우 '신문구독'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50여 명 중 2∼3명, 또는 3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9.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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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처럼 듣고 싶었던 내용이 사건으로 구체화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세습사절이다. 한국교회 한켠에서 목회자가 자기 자식에게 자신의 목회지를 양도하는 이 행위를 세습목회라고 해왔다.이는 세계 기독교 역사 중에서 한국교회에만 있는 용어이고, 풍조이며 기독교를 평가하는 기준 품목 중 주요 부분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평생 목회하던 임지를 자식에게 전승시켜 주는 것이 서양의 경우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뿔사 어찌하여 한국교회에서만 세습목회를 금기시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부끄러워하는 사태로 등장했을까?이는 한국교회가 ①교구제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8.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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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교회연합회(한교연) 바른신앙수호위원회(바수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 임무가 이단 및 이단혐의자 재검증이었다. 11명의 위원들이 3개조로 나누어 십수년 전부터 이단으로 확인, 이를 받아들여야 되는 교회나 목사들부터 시작해서 현직 한기총 대표회장까지 '재심' 대상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사실을 전해듣는 이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가지게 하였다.첫째, 한교연 바수위의 이단연구 대상인 사람들을 이전 기관들의 판별결과에 따른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안별 또는 개인별로 재심의를 한다는 것인지 분명한 한계가 없다. 이단규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8.2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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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로 이어지는 달콤한 언어는 신령세계의 방식으로가 아닌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바로 그것이었다. 노만 빈센트 필이 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이름의 책에 나타난 전향적인 경제원리도 그것이 그것들의 원리일 뿐 더 이상 논리로 발전하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의 한국교회는 60년대 후반, 또는 70년대로 빌리그래함 여의도 대회, 엑스폴로 74 등으로 이어가는 복음의 열심들이 한편으로는 성공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실패했다.그것들이 말하는 성공주의, 그것들이 개인주의나 맹목적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함으로 대한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8.2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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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터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풀) 소피아 예배당 앞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하는데 블루모스크에서 쏟아내는 듯한 '아잔' 소리, 예배시간을 알리는 이슬람의 독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일까?갑작스런 아잔, 아잔, 아잔…. 그 슬프기도 하고 자칫 음습하게도 들려오는 그 소리, 그날따라 얼마간 짜증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나는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날은 두려웠다. 내가 여행 중 피곤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소피아의 정문으로 갔다. 일반인이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8.0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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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의 존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현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분의 품격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의 현장이다.몇해 전부터 한국교회는 흔히 말하는 대로 안티세력이라는 이름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교회를 욕되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망설이게 하는 등 복음활동에 상당한 피해를 준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들의 요구가 전혀 사실과 다르거나 교회가 마땅히 그들의 꾸중을 교훈 삼아 신자의 길을 바로 잡을 만한 것이 없던가를 깊이 헤아려보아야 한다.교회는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7.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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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하여 근래 몇 년 동안 매우 불쾌할 정도로 반대 세력들로부터 시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약간 기분 나쁠 정도였는데 요즘들어 권모술수까지 동원해 치고 들어오니 긴장하게 된다.어떤 이들은 적개심과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교회를 향하여 총뿌리를 겨눈다든지 구체적으로 적개심을 품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때 실력있는 교회는, '허허! 당신들이 우리들의 약점과 허물을 잘 알고 있구먼. 우리가 잠시 방심하다가 이같은 꼴이 됐으니 용서를 하시오. 스스로 바로 잡고 온 세상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7.1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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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처럼 대표성이 빈약한 연합회들을 보완하자. 한기총, KNCC, 한교연, 한장총 등 보다 상회인 교단 총통합 모임을 만들면 좋겠다.현재 한국의 교회들, 교단 소속이 없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크고 작은 교단 이름 안에 교회들이 함께 하고 있다. 각 교단들간에 '크다'라는 자부심이나 별도로 도덕적 우월감이 있는 교단들도 있겠으나 크고 작은 교단들이 '총집결'하여 구체적인 연합회를 구성하면 첫째, 한국의 교회들간에 구성원들을 알 수 있다. 둘째, 목회자나 교회들간의 주요 지도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교회의 분포도를 알 수 있다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6.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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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구나.“시몬! 너 그 손에 든 칼을 거두거라!”늘 조용한 음성으로 베드로의 순수한 신앙을 감싸주시던 예수께서 오늘따라, 더구나 그래서는 안될 법한 겟세마네에서 작심한 듯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그리고 예수는 땅 바닥에 굴러떨어진 대제사장 집 하인 말고의 귓바퀴를 주워다가 그의 귀에 붙여 주었다. 매우 정성스럽게, 시뻘건 피 흐르던 것 다 멈추고 정작 피해자인 말고가 벌벌 떨면서 뒷걸음으로 두어 발걸음 물러선다.“시몬, 내 말 알아들었냐?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하느니….”“……?”시몬 베드로는 물론 다른 제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6.1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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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선교사들 중에는 '이스마엘 내 형제!'라는 표현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의 표현에서 신선도를 느낀다. 정신이 번쩍 새로워질 만큼, 우리의 가슴이 덜컹해질 만큼 흐뭇한 감동을 심어주고 있다. 전능자의 선물인 것 같다.일찍이 필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관계는 아브라함의 큰아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 이 두 집안의 싸움이고 에서(에돔)와 야곱 또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의 쌍둥이 아들 집안의 갈등의 연속 선상에서 출발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모압과 암몬의 관계도 아브라함의 친조카 롯과 롯의 두 딸에게서 불합리하게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6.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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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요 3:7) 하신 말씀 앞에 자기를 세워보라. 요즘 불교의 간부급 승려들이 수억원 대의 판돈을 내걸고 도박을 하고, 벗어붙이고 앉아서 술과 흥을 돋우는 장치를 해놓고 즐기다가 들켰다. 종단의 주지급들이라 했으니 신구기독교식으로 하면 주교급이나 큰 교회급쯤 될 수 있겠다.불교는 석가 탄일 가까운 때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서 쉬쉬 하면서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들은 혹시 불똥이 우리들에게도… 하면서 가슴 태우고 있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5.2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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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 이스라엘을 생각해 본다. 정말 아득했던 그날, 시드기야(유다왕국 마지막 왕)가 예루살렘 멸망의 시간에 혼자서 살겠다고 개구멍으로 도망을 쳤다. 바벨론 군대장수에게 붙잡혔다. '명색이 왕이란 자가 그래서 되느냐. 너희 백성이 지금 어떤 고통 중에 있는데 혼자 살자고 도망치다니, 수준이 천박하구나.'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두 아들을 그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즉참하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았다. 쇠사슬로 손발을 묶어 바벨론 감옥에 죽을 때까지 가두었다.시드기야가 야반도주를 할 때, 예루살렘 여인들은 품에 안고 젖을 먹이던 자식이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5.2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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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모리아에 대속(代贖)의 메시아 씨앗을 심어 그 은혜로 사람(人身) 제사시대를 끝내신 하나님은 새 시대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골고다 제단에 하나님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고, 다시는 제사가 없는 시대를 준비했으나 당시 하늘의 뜻 헤아리기에 무지했던 성전주의 자들은 허둥대고 실수만 연발했다.그때 주님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하셨다. '지금은 너희??라는 여운 남기시고, 잠시 생각에 잠기셨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5.0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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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문법은 의미상으로는 완료와 미완료 시제 뿐이다. 하나님의 세계이기에, 하나님이 명령권자이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완료형 해석이다.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은 미완료 해석이라 하는데, 당시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마르다의 미완료를 주님은 완료시제로 수정해 주셨다.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완료인데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성도가 미완료에 머무를 수 없다. 요한복음 20장 미리아와의 만남에서 그에게 인류역사상 두번째 부활 참여자로 인정하신 예수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4.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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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세계 운영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드디어 역사는 2020년대를 향하여 질주하는데 교회는 어디에 중심력을 확보해야 할까? 투정이나 부리는 늙은이처럼 이런 식으로 늙어가면 되는 것일까?예수의 골고다, 거기 인간사랑의 지극한 그 현장의 피냄새가 아직도 내 코 끝을 아리게 하는데, 그럼 나는 어디서 주님을 기다릴까?빈 무덤 주변을 헤매나, 아니면 엠마오 가는 길목을 지켜 나를 반기실 예수와의 만남을 이루나, 빈약해져가는 현실의 설득력을 안타까워 하지 말고, 좀 더 대담해 질수는 없을까?잠자는 코끝을 비트는 것이 아니라 갈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4.0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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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놓고 크게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뉘어 2천여년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사람이냐, 하나님이시냐'로 생각이 갈라져 있어왔다.'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물으시더니 제자들의 구구한 답변을 들으시고,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제자들을 바라보신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로 답변했다. 오늘의 기독교, 그리고 '나는' 어떤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가?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3.28 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