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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하나님의 독생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 또는 그리스도로 호칭된다. `메시아'는 히브리어의 구세주 표기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 표기이다.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의 일반적 호칭에는 별도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면 `메시아'를 사용하고 싶다.히브리어와 그리스어(헬라어)의 차이이기도 하고, 히브리와 헬라 사상의 간격 차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그 모체가 되는 메시아 사상은 이스라엘 족장시대의 신앙에 충실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를 만난다. 바벨론 포로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고, 알렉산더의 등장 이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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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10.02.0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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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하신 메시아 예수의 교회론 기초를 본다. 철저한 생명관리의 틀이 되겠다.바울의 지체론은 어떤가?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에서 27절까지 충분한 설명을 보라. 교회 공동체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웅변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바울 사도처럼 교회를 배우지 못했다.`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사려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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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10.01.2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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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바다를 여유롭게 헤엄쳐야 할 바다 고기 같은 교회들이 지극히 제한된 구조에 갇혀 있음을 볼때는 화가 나고,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안타까움이 있다.사는 방법이 어찌하여 이토록 왜소해졌을까. 돌이켜보면 화려하기도 하고 찬란했던 기독교의 시대가 있었다. 로마제국 초, 그리고 종교개혁기, 그때에 비하면 오늘의 교회들은 참 많이 퇴색했다.어항 속의 고기 떼 같다는 표현을 해보지만 그래도 한국교회에게는 미안하다. 비록 어항 속에 갇힌 고기 떼 같기는 해도 한국교회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열심, 단호한 목표, 무한한 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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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10.01.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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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그를 파송해준 수리아 안디옥교회와 결별을 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나 하는 수 없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권유와 강요에 의해서였을까 `유대파 기독교'로 변신해 버렸기에 부득이한 결단이었다.우리는 이 같은 불행의 단초를 갈라디아 2장 11절에서 발견하게 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을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안타까운 일이다. 게바, 곧 베드로는 예루살렘 감독 야고보의 잘못된 신학과 신앙에 오염된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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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10.01.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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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일찍부터 영재교육을 해왔다. 요즘은 학문과 예술은 물론 기능에 있어서도 영재교육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농작물까지도 공해로부터 보호는 물론 육종(育種)을 통하여 더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품질로 만들어 내려하지 않던가.‘들소리’는 초창기 이전서부터 개교회 정원이 80명 내외이면 매우 우량한 교회가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가지고 사시듯이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십일조의 지분이면 개인 생활이 가능하니, 십의 구조(90%)는 십일조와 헌금으로 교회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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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2.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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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임마누엘의 실체이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의 균형축이고, 하나님의 유형세계의 유일한 표현이다.19세기에 이르러서 칼 마르크스나 찰스 다윈의 등장은 교회가 교회의 존엄을 지켜내지 못해서 나타난 심판기의 전조였으며 그 결과 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제 3차의 시기는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한 천상회의에서는 거론하고 있을 것이다.더 역사를 앞당겨 보면 6세기초 로마제국의 최대 영토를 자랑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527∼655)시절에 황제와 황후인 테오도라의 상호견제는 잠잠해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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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2.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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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상나라의 존엄이요 그 실체인 교회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 인간 자신을 위해서는 존엄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교회는 존엄의 구체적인 열매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방인 신자들이 중심되어 모인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바울 사도를 내셨고, 에베소 지역교회들은 사도 요한을 내고, 로마교회는 베드로를 인물로 배출했다. 이쯤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속사도 시대 안디옥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제자들을 돌보다가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고 있었다. 그 때 타 지역 제자들이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을 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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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2.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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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언제부턴가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매우 바람직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신자들 사이에서 잠자고 있는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 제자(弟子)라는 소명을 부여했더니 교회 기능이 활발해진데 따른 호응이었다.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는가. 주 예수의 교회가 활기를 띄고 일당백(一當百, a match for a handred)이요, 30배, 60배, 100배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그러나 예수께서 교회(성전)를 평가하시던 요한복음 2장의 내용 때문에 우리는 마음 속에 큰 부담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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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2.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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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의 존엄이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사람 되심의 현장이고, 그가 사람과 함께 하셨으니 사람이 하나님처럼 살게 되는 바로 그 현장인 것이다.이 세상에는 예수의 무덤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불이 꺼지면 곧바로 예수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그래 이 땅에 예수의 무덤이 많으면 세상이 까맣게 어둡고, 그 무덤이 부활체가 되어 그 안에 예수의 생명들이 약동하면 밝음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장사꾼 같은 교회 사업가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시장바닥을 만들고 있으니 예수여, 주님은 오늘도 채찍을 들어야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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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2.0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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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싫은 소리를 앞세워야 하는가? 6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어 그 나라를 위하여 온 몸을 불사르는 전도자가 되고자 옹근 포부를 키워왔던 내가 스무살 나이에 세계기독교 역사책을 만지게 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이런, 성경의 요구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군. 기독교 역사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었다. 이럴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배신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주목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민족 고유의 토양이 운명론에 기초한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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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1.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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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님, 지난 1월 2일자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목회는 사람 많이 모아놓고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 내용 주요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남는 것은 사람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한 건물이나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내가 영향을 끼친 소수의 사람들이 남습니다. 목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자체로는 영향을 끼칠수 없어요. 어느 정도야 영향을 끼치지만 사람들이 진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던지는 것은 멋있어 보여도 남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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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1.1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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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교회성장이 둔화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났다. 체감으로 느낄만큼 신자가 줄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방법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비상한 방법을 찾느라고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이론상으로는 간단할성 싶은데 막상 전도현장에 나가면 쉽지 않다. 그러나 `작정 전도'라도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 대상을 지목하여 전도할 계획을 세우면 좋을 것이다.처음에는 3명 정도를 필요에 따라서 선택을 한다. 사귐을 통해서, 지속적인 기도로, 의도적인 사귐의 요청으로, 복음을 직접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찾는다. 어느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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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然>
2009.11.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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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하나님의 요구이다. 그 시한은 영원이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궁극이요 기본적 요구이다. 예수께서 어느날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서에서는 이 사건기사가 책의 앞부분(제2장)에 배치되어 있다.공관의 저자들보다 제4복음서 기록자는 이 내용의 절박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채찍질하여 성전 밖으로 몰아내셨다. 예수의 이 모습을 지켜본 바리사이들이 `당신이 이같이 행하는 표적이 있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예수는 기다렸다는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11.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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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사 하늘 땅을 하나로 만드신지가 2천여년이다. 그 기독교가 중세사(中世史)로 건너와서 한눈 팔다가 암흑의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 16세기, 1517년 10월 31일 이후 근세사(近世史)를 열면서 종교개혁을 시도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듯 했으나 개혁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개혁의 소신은 커녕 그 당위성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를 느낀다.무엇이 위기인줄도 모르는 철부지 한국교회의 몇몇 배터질만큼 넉넉한 부자교회들, 부자는 아닐지라도 그럭그럭 살만한 중급 교회들이 `종교놀음'에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10.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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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는 배째라 신앙이 있다. `배째라'는 말은 빚진 자들이 하는 말인데 더이상 다른 방법으로는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정히 빚을 받아가려면 내 배를 짼 다음에 배 속에 들어있는 밥 찌거기라도 긁어가라는 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참으로 끔찍하고 잔인한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조 후기, 그러니까 임진·병자의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나서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는 먹고 살기 위하여 족보도 팔고, 마누라나 자식까지 팔아 넘기면서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때였다. 그러니 배째라의 의미를 대충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10.1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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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구 목사와 들과 산을 다녀왔다. 그 아름다운 산행길에서 친구는 자기 이름(아호) 하나를 만들고 싶다면서 넌즈시 무릇 계(誡)란 근접할 수 없는 금기가 있어야 할지니 시비 간에 넘침(溢)이란 과(過)가 된다면서 스스로를 계일(誡溢)이라 하고 싶다는 것이다.이에 나는 화답의 뜻으로 그래도 이름에는 운율이 있는 법, 또 어휘를 뒤집으면 빛깔, 맛깔 등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으니 `계일'을 뒤집어보라 하였다. 일계(溢誡)로 말이다.그래서 내가 절반쯤 도와서 溢誡, 김 목사님이 내게 또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 溢誡 선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10.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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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성자·성령 하나님 안에서 신자의 기본틀을 지켜가는 신자를 이 가을에 생각해 본다. 열매 맺은 신앙이면 `성령 안에 있는 신자'이다. 성령 안에 있다 함은 삼위일체 안에 있다함이 된다.기독교는 삼위일체 신앙의 표준으로 자기구분을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초기 예루살렘교회나 수리아 안디옥 교회 등이 유대파 기독교 또는 율법에서 해방을 받지 못한 교회로 탈락을 했으며, 마르시온이나 아리우스 같은 영지주의 또는 단성론자들, 프랑크 게르만을 제외한 그 많은 게르만족 기독교들의 단성론은 물론, 유대교나 이슬람 등 소위 `유일신론자'들은 예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09.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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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천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면서 세월 속에서 느낌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대학에서만 35년째 교회사 강의를 해오는 동안 추적해온 나의 시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초기 세계 교회사를 읽었던 날에 나는 배신과 배반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가 어찌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배반할 수 있는 것이냐? 비분강개였다.그러나 새천년, 다시 21세기로 질주해 가는 세월과 동무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하신 말씀대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09.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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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치사하다. 온갖 장난을 골라서 하고 있다. 지난 5일 새벽 2시경 임진강 상류의 댐 수위가 높아져 댐의 물을 급히 방류했다고 해명하는 북한. 인명피해에 대한 유감 표명은 없이 말이다.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의 수량(4천만t) 정도는 우리 군이나 관계 당국이 기본적인 자기 관리를 했다면 큰 문제가 없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마치 장난치듯이 하는 꼴이 너무 볼성사납다.어떻게 하면 남북관계에서 묘수를 찾을까. 무슨 묘안이 있을 법 한데 그게 떠오르지 않는다. 남이 나를 우습게 본다는 것을 내가 확인할 때의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09.0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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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세상에 오사 세우신 교회는 본디 우주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힘을 가졌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민족 대 이동기에 이민족 세력들에게 휘둘리면서 기독교 또한 몇번인가 극심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그러나 어떤 별난 이가 쓴 〈기독교 죄악사〉라고 할만큼은 아니었다. 기독교 역시 이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생명체로서 역사의 긴 질곡의 날을 살아오다 보니 죄악의 함정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죄악을 즐겼다고 할 수는 없다.성경을 펴, 이사야 66장 1절 이하 2절까지를 읽으면 이사야 선지자의 찬란하고 또 가히 우주적 스케일이라
22세기 대안
편집부
2009.09.02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