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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잔을 '함께' 체휼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개구멍'으로 들어온 도둑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도 이런 따위의 말기 증상이 있는데 로마에서는 중세에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이것 저것을 따질 것 없이, 부끄럼을 느낄만한 일들이 있다. 탐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자들, 온갖 아부를 다 떨면서 강자의 눈도장 받으려고 추잡을 떠는 자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의 자리를 앞에 두고, 그 십자가를 체율하고자 하는 너여! 이 잔을 피하지 마라. 요단강 세례 후 주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 거기서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3.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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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소리'가 고통을 더해야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무슨 수가 있나요. 방법이 없지요. 그러나 독자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로할 더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목사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말, '고난 그리고 죽음'일 뿐입니다. 신문사에서 구독자 목사님들과 대화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신문은 읽고 싶은데 구독료가 월 4천원이지만 그게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경제환경으로 볼 때 한달에 4천원이 자기 생활의 균형을 깰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진실로 가난하다는 것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3.0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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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스라엘의 '다시 태어나기' 현장을 한번 더 말해 보겠다. 모세의 백성이 유월절 절차를 통과, 홍해 바다를 무사히 건너 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그의 백성 인구조사를 시켰다. 이 내용은 민수기 1장에 있다. 그리고 민수기 26장에서 또 한번 인구조사를 시킨다. 이때 20살 이상의 전투요원 숫자는 비슷했으나 1장과 26장의 인물들은 '아버지와 아들들'이다.아, 기상천외(奇想天外) 할 발상을 보라! 아비가 죽어 그 아들 대에 이르러서야 아비의 명예와 인간적 존엄을 지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 않은가.이 교훈이 모세의 것인가?
22세기 대안
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2.2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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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아들 모세는 고난받는 그 백성을 이끌고 홍해 건너 시나이에 와서 그의 민족을 조직화 했다. 놀라운 지도력이었다. 민수기 1장과 26장을 읽으면 모세와 그 백성의 수준을 알게 된다.시나이에 온지 2년 되던 해 그는 적과 싸우고 자기 백성을 지킬 수 있는 20살 이상의 장정들만 계수하여 60만여 명을 조직화 했다. 사막의 떠돌이 생활이니 거처가 있나, 먹고 살 터전이 있는가? 그것도 한 자리에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40여 년을 광야의 나그네 였으나 오로지 백성들을 견고하게 훈련시킨다.그들의 훈련 4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2.2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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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현실이다. 해 지고 다시 뜨는 것 만큼 분명한 징조를 보았으나 자고 깨는 절차마저 감당키 어려우니 밤에는 뭘하고 낮에는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1세기 전, 그러니까 1910년 나라를 통째로 내줄 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 그때 많이 부끄러웠지. 개항기가 분명히 코 앞에 다가왔음에도 나라의 문을 열 수 없었던 100여 년 전. 그때와 유사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혁명기가 왔는데 혁명가들이 없다면 바로 이게 무정부 상황이 아닌가. 곧 그 징조가 나타나 해일처럼 덥쳐올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2.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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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는 AD 70∼80년대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유다왕국의 완전 멸망 후 서로 기대고 살아왔던 유대인들과 초대교회 절망을 지켜보았다. 요한복음은 설상가상으로 영지주의(Gnosticism)의 횡포까지 겹쳐 교회가 자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하여 1세기 기독교 이후 구원투수 역할을 해낸 복음서이다. 그리고 이 책은 초대 기독교의 유일한 버팀목 역할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턴가 요한복음서 이름 앞에 헬레니즘(Hellenism)의 아류라는 딱지가 붙었다.1. 요한복음은 헬레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헤브라이즘의 깊은 심저(心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2.0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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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는 성격이 매우 신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괴팍한 사람같이 느껴진다. 신중하다 함은 주님께서 영지주의자(Gnosticism)들에 대한 대응논리를 제시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면서도 그는 글쓰기를 마냥 주저했고, 글이 지닌 실제적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처럼 늑장을 부렸다. 게다가 그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임은 요한복음 1장 1절과 21장 25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 1장과 21장 첫 구절과 끝구절은 하나의 함정이기도 하며, 무식꾼이나 도둑놈들은 내 책을 결코 열고 닫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1.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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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기본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차안과 피안의 구별을 해놓고, 현세 천국을 따로 만들어 놓고 종교장사나 해먹는 종교 모리배들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새해의 앞길이 이렇다. 다시 말해도 살아있음의 의미는 '이 성전을 헐어라!' 반드시 헐어내야 한다. 성전이 어디 있나? 정직한 자의 기도처가 성전이고, 사랑받을 만한 자들이 머무는 안방이 또 거실이 성전이지.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기에 예수 되려다가 모세의 박제품이 되어 있다.사람이지만 그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모르니 어찌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1.1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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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은 새해가 열렸다. 아주 뒤늦은 시간인 19세기 말, 극동아시아 대한조선을 찾아주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이 특별히 있으실 것이다. 인류 구원사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파쇠시킬 때에 인류는 동서 사방으로 흩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때부터 세계 속으로 흩어져 간 인류의 어느 한 유형이 한반도에 자리하기까지의 우리 민족은 어떤 흐름을 탓을까?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을 탈출한 아브라함처럼, 우리 민족도 북방 루트를 따라서 한반도에 정착하기까지 은총의 날들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이 생각을 해보는 내 심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2.01.0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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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입을 틀어 막으면 돌들이 소리지르게 된다. 오늘의 '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가? 그것은 17세기 이후 '계몽기 무신론 철학'이 이방의 돌이었고, 두번째는 19세기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근세사 이후 기독교가 이방의 칼에 결정타를 받아 현재 세계 교회는 그 생명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다. 심각하다. 세계 교회가 위기의 상황임을 깨달아야 한다.저 돌들의 소리를 들었는가? 16세기 신구 기독교가 개혁이라는 대의 명분으로 출발했으면서도 결과는 서로 교세 쟁취를 위하여 30년 전쟁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2.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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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독교 기본교리인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흔들려 시비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한국교회에는 있다. 무엇이 이같은 사태로 몰아가는가. AD 325년 제 1차 니케아 회의가 열려 이단자 아리우스를 처단했던 그때 아리우스는 기독교의 은인을 자처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업고 겨우 18명의 대의원으로 300여명이 넘는 대의원들을 상대로 수개월 동안 괴롭혔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실상 '기독론' 이나 '삼위일체론' 이 확정되어 있으니 한나절 청문회를 열면 시비를 가릴 수 있다. 또 시간이나 비용이 얼마큼 들더라도 청문회 절차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2.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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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한국의 도시들이 잠시 후에 교회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 지역에 와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리고 당신들 교회가 우리 지역에 무엇을 주느냐?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바로는 소음과 교통체증 뿐인데요.”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재래시장 틈새를 파고 든 대형 마트처럼 세몰이식 대형교회를 시도하는 이들은 이미 신약성경 정신과 신약교회 신학을 배반한 교회들로 장차 하나님의 징치의 대상에 오를 수 있다.앞서, 주민들이 하는 말들을 분석해 보라. 당신들이 우리 지역에 와서 대형교회를 한답시고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2.0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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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無然)의 이름으로 상당히 긴 기간 이 지면을 맡으면서 가끔씩 훈계하는 듯, 지식을 뽐내는 듯,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기분이 사알짝 나쁘게 하는 필법을 동원했다. 남쪽에서 쓰는 말로 빈정 상할 만큼 말이다.지금도 내 글투를 바꾸고 싶지 않다. 읽기 싫으면 침뱉고 등 돌리면 그만, 내가 이런 식으로 글 쓰는 것은 자유고 당신은 등 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오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문제로 요즘 시비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그 균형과 조화라는 측면을 말해보고 싶다. 3세기의 도나투스파의 열광처럼 19세기 말 등장한 오순절파가 제 3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2.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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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문제 시비가 1년 계속이다. 이제는 한국장로회총연합회(한장총)를 긁어부스럼 내면서 2012년으로 이어갈 심산인 것 같다.그러나, 이제는 싸움 그만하자. 대표회장 하고 싶은 사람, 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그 자리 내주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게 하라. 자리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한가. 겨우 1∼2년 봉사하는 자리인데, 그리고 그 자리 앉으면 큰 것 챙기는 것도 아니고 봉사와 섬김 뿐 무엇이 또 있는가.대표회장 할 사람이 많으면 1년 단임제로 해서 회전시키고, 그것도 모자라면 '복수 대표제'를 만들어 고대 로마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1.2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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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따르는 자들에게 '작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신 때가 있었다. 주님은 길지 않은 공생애이기는 하지만 이름 지어주는 제자 열둘을 길러내시고는 훌쩍 세상을 떠나셨다. 언제까지 작은 무리일까? 늘 이 말씀 앞에 붙잡히면 안쓰럽고 애처롭다. 요한복음 16장 12절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가룟 유다가 떠난 후 나머지를 이끌고 감람산 벳바게로 가시는가? 공관복음으로는 겟세마네 가시던 길목이다. 예루살렘 여행 경험자들은 알겠으나 웃길은 천년 수명을 지녔다는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1.0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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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 인구 100%가 기독교 신자라 해도 현재 한국교회의 구조와 그 교회관 수준이면 복음의 완성이거나 승리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국민 구성원 모두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고통이 될 것이다.왜냐하면 현재 대한민국 교회는 예수에게 반역이 되는 별도의 교파를 무한생산해 내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교회인 예수의 교파여야 하는데 저마다 예수의 이름을 거부하고 '자기 이름'으로 교회와 교단을 만들어 가고 있다.그러나 분명히 알라. 예수 이름이 아닌 별도의 교파, 별도의 부흥, 별도의 전도와 선교, 심지어 순교까지도 교파주의에 휘말릴 경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1.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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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리아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뒤흔들면서 일어나 세계사의 중심인 지중해 쪽으로 이동하여 다윗이 일으킨 왕조가 빈틈을 보이자, 수리매가 씨암탉 채가듯이 쪼개진 북왕조를 단숨에 집어 삼켰다.다윗이 살아있다면 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충직했던 다윗은 하나님 품 속으로 가버린 뒤라 이스라엘은 한번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하고 망했다. 앗수리아는 다윗의 동네인 예루살렘을 또 노렸으나 여의치 않아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소포타미아 지대가 또 요동을 치더니 앗수리아가 물러나고 바벨로니아 왕국이 다시 일어나서 다윗의 궁성인 예루살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0.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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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언어가 분명히 있는 쿠르드족은 현재 이라크·이란·터키·시리아 등 변방에 무려 4천만여 명이 영토가 없어서 국가수립을 못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다.저 옛날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때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 문명권 종족이었으나 주권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끝없는 유랑, 시대의 강자들에게 붙잡혀서 지금도 용병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다.나는 터키에 가면 아라랏산 변방을 가끔 찾아가서 쿠르드 난민들을 만나곤 한다. 명년 봄 쯤, 또 가서 그들의 안부를 듣고 분명히 낙오자 집단이 되어가는 그들을 위로하게 될 것 같다.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의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10.1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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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9월이면 '대한예수교장로회'들이 정기 총회를 연다. 그리고 폐회와 동시에 다음 해 총회를 준비한다. 한국의 장로회들이 북미에서 주로 19세기 말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나 한국의 칼빈파 교회들의 특성상 현재에 와서는 독점 형식이다.1885년 부활절날 아침 제물포항을 통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들 두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기 직전, 누가 먼제 내릴 것인가에 대한 조심성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장로회 배경의 언더우드가 감리회의 아펜젤러보다 자연인 수명도 길었지만 활동의 폭이 넓어서 한국에서는 장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09.2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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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또는 경지라 표현할 수 있는 한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를 말할 수 있겠다.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중에 그 됨됨이나 품위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경지에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에 더하여 그 당사자의 모습으로 일세를 거닐어 볼 수도 있을까?그토록 그리웠던 그 경지, 그렇게 간절했던 그 하나를 향하는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기다림이 필요할까. 그 가까이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몸짓을 통해서 배움을 얻자 했던 긴 날들은 가고 이제는 아쉬움과 조바심까지 있어서 안타깝다.예수는
22세기 대안
편집부
2011.09.22 1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