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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7〉나의 삶, 나의 목회연중 제자훈련을 다섯 개 반이나 네 개 반을 운영하여 좀 피곤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보람된 사역이었다. 또한 교회는 제자훈련과 성경공부로 무르익어 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었다. 제자훈련반 외에 성경공부반을 많을 때는 15개 반, 적을 때는 10개 반을 실시하자 교회 성도 전체가 성경공부에 대해서나 제자훈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여건이 갖추어지자 든든한 교회, 자리 잡힌 교회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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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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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6〉나의 삶, 나의 목회목회자라면 누구나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마음에는 한결같다. 그러므로 교회부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앞다투어 자기 교회에 도입하고 자원해서 훈련받고 부흥을 위한 목회개발에 열중하기 마련이다. 교회부흥의 조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우선 조건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교회부흥은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큰 명제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또한 목회자의 강단이나 신앙인격이나 영성이나 지도력도 중요하다. 그 외에도 좋은 교회 위치와 예배 공간인 예배당도 빼놓을 수가 없다. 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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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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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5〉나의 삶, 나의 목회손을 잡고 함께 통성기도로 감격스러운 건축헌금 작정을 위한 기도를 마쳤다. 그리고 당회원들의 양해를 구하며, “한 주간 동안 내게 시간을 주시면 장로님들이 위임한 대로 건축헌금을 한 분 한 분 정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일 다시 당회로 모이면 나는 붓글씨를 잘 쓰는 편이 아니지만 정성을 담아 장로님 이름과 건축헌금 금액을 붓글씨로 써서 봉투에 담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또한 내가 정한 건축헌금이지만 장로님들이 개별적으로 보신 후에 금액을 줄여도 좋고 늘려도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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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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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4〉나의 삶, 나의 목회교회의 양적 성장은 예배당이 끼치는 영향이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차 성전 건축을 통해 예배당이 우뚝 솟아 멀리서도 은평교회를 볼 수 있었고, 빨간 벽돌로 규모 있게 예배당의 외모를 잘 갖추게 되어 새 가족들이 찾아오는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성전을 건축하는 데도 단순한 예배당이라는 조건 외에 하나님의 전이라는 신성한 의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건축 속에 신학적인 의미를 포함하면 더 좋은 예배당이 될 수도 있다. 예배당을 여러 번 건축하면서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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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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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3〉나의 삶 나의 목회은평교회는 1962년에 서울역 건너편 도동에서 개척된 교회이다. 7년 동안 2층 건물을 빌리기도 하고 천막을 치기도 했으며 가건물로 예배당을 꾸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현 은평지역이 신개발지역으로 논밭이 주택가로 바뀌게 되자 역촌동 85-38 현 위치로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1969년도에 60여 명의 성도들이 대지 130평 위에 60평 예배당을 건축하여 은평교회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또 지역이름을 따서 서광교회를 은평교회로 개명하였다. 이때는 교세도 약하고 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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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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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2〉나의 삶, 나의 목회1975년에 은평교회를 담임한 뒤에 개교회가 잘 자리잡아가게 되어 지역교회와의 연합사업에도 적극적인 협력을 나눌 수 있었다. 단순한 연합사업이나 지역교회 연합회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지역교회가 힘을 모으면 교회활동이나 지역교회 행사를 통해 지역 복음화와 지역선교에 유리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수원에 있을 때에도 교회 연합회를 통해 부활절연합예배와 삼일절연합예배를 함께 드려 한 도시 안에서 교회가 공존하는 큰 유익을 나눌 수 있었던 일이 서울에 와서도 이어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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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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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1〉나의 삶, 나의 목회은평교회는 추대 받은 원로목사님이 계신 교회여서 더 조심스러운 목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원로목사님이신 김홍순 목사님은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우리 교회 뿐 아니라 교단의 어른이시기도 하였다. 성격이 쾌활하고, 매우 적극적이며 사교적인 분이었다. 항상 바지에 주름이 반듯하게 잡혀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도록 머리에도 기름을 바르며 외모를 가꾸어서 전혀 노인 같지 않았다. 또한 다변적인 성격이어서 아주 사교적인 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말도 적은데다가 성격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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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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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40〉나의 삶, 나의 목회교회에 새로 부임할 때마다 느낀 일이었지만 은평교회도 예외 없이 뜨거운 환영으로 교회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부임하는 첫 주일에 취임식을 겸하게 되어 부임하면서 치리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는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비교적 담임목사가 해외에 나가있는 기간이 많아 교회의 영적인 공백을 메꾸고 싶은 뜻에서 신속하게 교회의 치리권을 지방회에 요청한 것으로 느껴졌다. 어느 교회에 부임할 때나 느낀 사실이지만 은평교회에서도 교회와 부임하는 목사 사이가 몇 년 동안 목회한 것처럼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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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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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39〉나의 삶, 나의 목회놓고 당회원과 장시간 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서울로 가게 놓아달라는 부탁과 그에 맞서 보내드릴 수 없다고 사정하는 장로님들에게 정말 어려운 부탁을 계속하는 일이 힘들었다. 결국 장로님들이 자기들끼리만 따로 의논을 하고 들어오겠다고 밖에 나가 의논을 한 뒤에,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로 옮겨 가신다니 우리가 목사님을 돕는 마음으로 목사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의사를 전달해서 결국 수원교회 사임이 좋은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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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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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38〉 나의 삶, 나의 목회교단분열로 인한 상처가 15년 가까이 지속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수원교회는 내가 부임하던 해까지 같은 교단 안에서의 분립개척이 아니라, 교회 절반 이상의 성도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분할 개척되는 아픔을 겪고 있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1년 이상 힘들었던 것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교회는 급성장하여 400명 선으로 성장하는 감격을 경험하기도 했다. 수원교회에 대해 고마운 마음과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은 내가 1년 내내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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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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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37〉나의 삶, 나의 목회금식기도 기간 35일째 되면서 본래 눈이 나빴던 나는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 전에는 성도들의 면회를 거의 사절했는데 시력을 잃은 뒤에는 성도들을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찾아온 성도들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음성을 통해 누가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눈이 약하기 때문에 몸에 영양이 떨어지자 눈으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 경우에 한하는 체험이기도 했다. 나는 성도들과 약속한 대로 40일을 채우지 않고 38일 만에 하산하였다. 눈이 안보여서 수원 기독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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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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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36〉나의 삶, 나의 목회특별히 시간을 정한 기간에 기도한다는 목표가 있거니와, 본인의 마음가짐도 특수한 기도에 집중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소중한 기도였지만 하나님도 이 기회를 통해 나를 위해 특별히 계획하신 은혜들이 있어서 나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묶여진 은혜로운 기간이었다. 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16일째 되는 저녁이었다. 이 날도 꿈을 꾸었는데, 군인들이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는 꿈을 꾸었다. 행군대열 속에 나도 함께 행군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행군하고 있는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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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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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 `회고록' 〈35〉나의 삶, 나의 목회나는 은산교회에서 7년, 수원교회에서 7년, 은평교회에서 31년, 45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은평교회는 내가 부임하던 날만 다른 본문으로 설교했고, 그 다음 주일부터 창세기 1장부터 강해설교를 시작하여 2004년까지 계속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에스더, 다니엘, 말라기,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는데 30년이 걸렸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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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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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기도를 통해 받은 은혜들금식 후 20일이 될 때까지는 날마다 두 시간 성경 보고 두 시간 기도하는 날들이 거의 이어졌다. 또한 오후 3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는 일로 시간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깊이 깨닫고 정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별히 금식기도 기간 중이어서 마음가짐도 새로웠고 말씀을 사모하는 깊이도 달랐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말씀을 관찰하는 것과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관찰하는 것은 또 다른 영감을 받게 했다. 금식기도를 시작한 처음 이 삼일 동안은 나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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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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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기도의 덤으로 주신 은혜한달 이상 준비하고 시작한 금식기도여서인지 마치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도가 이어졌다. 금식을 시작한 다음날까지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도 담담하게 이길 수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은 정말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그 유혹으로 인해서 금식기도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도 육체가 원하는 것은 역시 음식이기 때문에 식욕을 물리치는 기도를 여러 번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금식을 시작한 후 4일 동안은 저녁마다 꿈을 꾸면 음식을 먹는 장면을 꿈꾸거나 밥상을 잘 차려 내 앞에 가져다 놓는 꿈을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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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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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일 금식기도 첫 날수원교회는 여러 군데 비가 새고 너무 낡은 건물이어서 수원교회에서의 목회가 정착되기도 전에 예배당 개축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름만 개축이지 60평이던 예배당을, 전면 종탑과 전체 벽과 15평의 중2층과 후면 25평을 합하여 100평으로 증축하는 공사여서 신축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개축공사를 할 때 담임목사 사택까지 신축해서 수원교회로서는 큰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공사를 마치고 나자 의외로 성도들이 흐뭇해하고 만족스러워 했다. 당시로서는 수원교회 목사관이 수원시나 경기도에서 제일 좋은 목사관으로 소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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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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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자수원교회에 부임하여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던 날 취임식까지 겸하게 되었다. 교회분쟁으로 상처 입은 교회라는 것은 알았지만 주일 낮 예배에 45명밖에 나오지 않아 수원교회의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만 했다. 나는 이사오던 날, 50여 명의 성도들이 나왔기 때문에 주일에는 100여 명 정도의 성도들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모인 사람들이 교회 전체 신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새로운 각오를 다시 다짐하게 되었다. 시골교회지만 350명이 모이던 교회에 있다가, 50명 정도 모인 성도들 앞에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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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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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교회는 7년 동안의 목회였지만 몇 십 년 목회한 것만큼이나 바쁘게 살았고 목회생활에 푹 빠졌을 정도로 은혜롭고 행복한 목회였다. 직원이나 교회 안에 갈등이 전혀 없었고 내 능력이나 역량껏 목회할 수 있는 자유로운 목회였다. 목회자도 부담 없이 일할 수 있었고, 교회도 모든 성도들이 담임 교역자를 어떻게 도울까만 생각했을 정도로 좋은 교회였다. 은산교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담당해준 교회여서 더 잊을 수 없다. 은산교회를 떠나던 날을 회고해 보면 은산교회 성도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목회자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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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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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청빙 과정은산교회에서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일은 중학교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5회 졸업생을 내면서 청소년 교육을 도왔던 일이다. 그때에 거의 생활비가 되지 않는 낮은 보수로 학생들을 위해 수고했던 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김종필 씨가 부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여러 지방 유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자리에 은산면 공화당 위원장과 내가 동참하게 되었고 마침 김종필 씨와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김종필 씨가 “은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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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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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몸담을 수 있는 교회변 집사의 회심은 단순한 개인의 회심이지만 그 가정과 교회에도 자랑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타락하고 본인이나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버려진 사람처럼 여겨졌으며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단정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변화되었다. 가족들의 마음이 편안해졌고 웃음이 살아났고 평안한 삶이 온 가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생업이 바뀐 것도 아니고 똑같은 엿장수였지만 더 부지런하게 노력하고 장사에 신바람이 난 태도로 바뀌자 배나 더 잘 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변화된 성실한 태도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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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1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