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권과 정치권은 정신적 수준을 같이 하는가? 한국정치사 70여 년 동안 현 정권이 한국교회 행태적 속성을 가장 많이 닮았음을 보게 된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한국교회의 수구적 보수성향이 위선자를 무한 생산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현 정권의 정책 실력자들이 한국형 기독교를 아주 많이 닮았다.예를 들어보면, 한국교회의 기독론은 마치 자기들이 예수가 되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했는데 자기의 윤리적 수준과 상관없이 마치 심판자 행세를 하고, 윤리적 완벽성을 주장하면서 정의와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고
사설
논설위원
2021.03.30 17:13
-
우리는 네 편 내 편에 익숙하다 조선조 중후반 사색당쟁이 그렇고, 크지 않은 땅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또 그렇다. 1천여 년이 넘도록 고구려, 신라, 백제를 중얼거리다가 당나라에게 망했고, 스스로 지쳐서 기상이 꺾여버렸을 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나뉜 것 또한 임진왜란 수습과정에서 명나라와 풍신수길이 황해반도와 원산만을 그어서 북은 명나라가 남은 일본이 각각 먹어치우자고 하다가 풍신수길이 죽게 되면서 끝났다. (1905년에) 일제에 속박 되어 살았다. 해방과 분단은 38선으로 나뉘어서 70여
사설
논설위원
2021.03.04 11:31
-
시대는 장기전을 요구한다. 레지스탕스 자세라고 할까. 그래서 필마단기(匹馬單騎)로는 어렵다. 다른 표현으로는 지구전이어야 한다. 우선 지금 보유하고 있는 교회인구를 일당백으로 정예화하다. 교회를 학교 제도화로 각각 계층과 신앙력 수준을 따라서 전문반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장년학교에서 유년학교 식으로 신앙의 경험, 경력, 체험, 기본지식 등을 감안하여 또 각기 생활 형식과 정서를 감안하여 그룹을 만들어서 교육과 훈련을 거듭하자.물론 신앙생활이란 것이 고달프고 힘겨운 인생살이 도중에 잠깐씩 드나들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수준에서 대부
사설
논설위원
2021.03.04 11:31
-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다. 열심 있는 이들은 관공서 앞으로 뛰어가기도 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억울하고 울분에 찬 노여움이었으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더 깊은 생각도 있었으리라. 우리가 방심하다가 일본의 노예가 된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는 자괴감이 포함된 울분 말이다.1919년, 동방의 조용한 은둔의 나라로 알고 있었던 당시 세계인들은 3.1만세운동에 깜짝 놀라고 지대한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었다.동방의 한국인이 세계무대에 자기 소개서를 내는 날이었다. 그날 이후 1945년 해방기가 올 때까지 우리는 힘차게 싸워왔다. 만
사설
논설위원
2021.03.04 11:30
-
북한이 어느덧 핵보유국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이즈음에 남북관계가 통일지향일까, 국가 간의 간격으로의 이웃일까를 생각해 본다.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으나 현실은 현실이다. 민족은 하나이지만 민족지상주의를 앞세우기 위해서는 인간 현실은 냉혹하다. 북한은 공산주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인데 어떤 사귐으로 이어가야 할까?그러나 서로를 존중하는 이웃사촌의 관계부터 열어야 한다. 이상론은 통일, 현실론은 이웃까지다. 농경사회라면 모르지만 현대사회는 간단치가 않다. 분단 초기만 해도 농경중심이었으나 오늘은 첨단사회다. 그래서 2
사설
논설위원
2021.02.04 16:47
-
해방기 전후로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보수 또 진보라는 이름으로 두 조각 난 이후 아직도 교회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이 같은 속성은 이기적 분열에 명분을 주어 많은 소영웅적 인물이 일어나서 교파(교단)를 쪼개서 잔재미를 보고 있다.사회 정치현실도 어느덧 닮아가는가, 현재 한국의 정치구조를 보면 무엇이 보수이고 또 진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80년대 전문 운동꾼들이 대거 일어나서 드디어 그들이 현재 50대 초중반을 이루고 한국의 정치에 뛰어들어서 진보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들 또한 보수적 기본
사설
논설위원
2021.02.04 16:46
-
백신이 세계 각국에 주어지고 있다. 드디어 코로나19 극복이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우선 한국교회가 부딪히게 될 대면과 비대면 예배가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가기 힘들게 되었다. 대면과 비대면의 형식이 아니라 복음의 원형 찾기 과정의 시대적 변화다. 코로나 충격이 예배나 종교 양식의 근본 찾기 운동으로까지 접근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예수께서 활동하셨던 모습을 떠올려 보라. 본 지면에서는 몇 달 전부터 대면과 비대면 예배의 공유는 축복의 지름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설
논설위원
2021.02.04 16:46
-
교회가 조직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이제 자기 모습을 더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가 대면과 비대면 식으로 자리 잡아갈 때 교회들은 숫자계산으로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코로나 환경이 만들어 낸 교인숫자 감소는 미자립이나 개척교회들의 생존에 문제가 발생한다. 현역 목회자들이 할 일 없어진다는 현실의 고민을 교회 본부(교단)들이 해결해야 한다.각 지역 교회환경을 더 냉정하게 점검하고 미 자립형 개척교회들을 재배치하고, 남아도는 목회자들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만약 유휴 목회들은 계속 방치하
사설
논설위원
2021.01.14 21:06
-
그리스도인에게는 무한책임을 요구한다. 이는 스스로 유일 종교, 절대 종교를 자임했기에 부득이한 결과이다. 실제로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요 그 품격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자신의 자기 현현으로도 신뢰한다.창조의 섭리에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사에 대한 무한책임을 통감하기에 늘 마음이 무겁고 또 결과에 대한 책임도 피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 앞에서 한국교회가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당국의 시책에 불평만 할 수 없다.엊그제도 부산의 모 교회가 당국의 질책을 받게 되니 ‘왜 우리만 지적하느냐, 지하철도 다니고…’
사설
논설위원
2021.01.14 21:05
-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은 문명의 전환기를 부르는 신호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예수, 즉 신앙 완성기를 향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세속문명은 우주시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 예수의 복음완성기로 향하는 마지막 주행이다. 등산가의 경우 9부 능선을 향한 마지막 과정으로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는 시간이고, 우주시대는 지구 팽창으로 달나라나 화성으로 이주해 가는 과학 전성기 우주시대를 말한다.과학은 과학이 갈 길 가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완성을 서둘러야 한다. 이의 시급성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독촉기간을 금번 코로
사설
논설위원
2021.01.14 21:05
-
한국교회의 성장주의는 시대마다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 1884년 초기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 교회와 한글성경 보급 등을 통해 민족을 계몽했고,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고난 속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핍박 속에서 소망이 없었던 교회는 오직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을 지녔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후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하여 일사각오 순교신앙을 지켰다. 1945년 해방이후 한경직 목사님,빌리그레엄 중심으로 반공과 부흥운동을 통해 엑스폴로 74와 77년
사설
이효상
2021.01.14 21:04
-
세계교회 모두는 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같은 21세기 현상을 앞에 놓고 걱정만 하지 말고 주 예수께 길을 물으라. 그리고 신자들 간의 연합하는 훈련을 하자. 통합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믿고 연합하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고 작은 교단과 교회들 사이에도 가슴으로 서로를 신뢰하자.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소 닭 보듯 하는 삐죽거림을 거두고, 서로가 동행하는 자세로 힘의 결집을 이루자. 서로가 서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지혜가
사설
논설위원
2020.12.22 21:56
-
지혜는 뱀처럼 순결은 비둘기처럼 하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한 귀로 들어 넘긴 교회들. 그들은 도적떼가 제 집 안방으로 뛰어들어 자기 마누라 겁탈하고 있는데도 그 꼴을 보고 즐기는 형편이다.대한민국 70년, 때로는 백척간두의 위기도 있었으나 기독교 유럽의 선진형 자유민주주의를 익혀가면서 도약의 길에 들어섰다가 지금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교회만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처럼 살아가기가 어려운 함정 앞에 서 있다.1648년 베스트팔리아(Westphala) 조약으로 자유, 사상, 학문, 정치적 표현과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는 마르틴
사설
논설위원
2020.12.22 21:55
-
2020년 성탄절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부르면서 한 해 인사를 나누던 날들을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성탄절은 송구스럽게도 감동과 설렘도 없이 스산하고 조용하다.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주 예수께서 온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오신 날, 전체 인구의 약 30% 정도가 그리스도인인데 스산하고 우울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코로나19가 집어삼키려드는 우리의 일상생활, 또 한 편으로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으니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 주 예수, 하늘 떠나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의 화평
사설
논설위원
2020.12.22 21:55
-
언제까지 “예수 믿고 천당!”만 외치고 있을 것인가? 프로테스탄트는 개혁교회다. 개혁이란 완전한 경지까지 계속 개혁을 뜻한다. 한국교회는 교회 절대주의나 계몽 철학기를 거치지 못했기에 지금도 루터·칼빈에 목을 메고 있다. 그들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16세기 교회개혁을 했던 신학자들이다. 역사는 17, 18, 19, 20세기를 지나친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사상이나 신학(철학)은 시대를 경유하면서 변신과 변화를 거듭해간다. 끝없이 쉴 날이 없이 자기부정을 하면서 발전해가는 것이 학문이고 또 신학의 양식이기도 하다. 그런
사설
논설위원
2020.12.03 10:03
-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사목자(司牧者)로서의 목회자나 만인제사를 신앙에 기초한 평신도 사목들 운동의 공동 선교 현장을 제시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은 평신도 신학, 평신도 시대의 열어감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제사장이 아니었으며 또 하나님 자신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제사의 당사자가 사람 앞에 나타났으니 종교 포기, 탈종교시대의 개념이다.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아프리카와 지중해 권이 “해방기”였기에 그 시대는 원초적인 종교와 신학의 제시가 되었고, 16세기는 뒤늦은 해방기를
사설
들소리신문
2020.12.03 10:03
-
좌파 욕하기에만 바쁜 수준으로는 길을 찾지 못한다. 유럽 프로테스탄트 후예라고 자부하는 한국교회는 그들의 수준을 모른다. 유럽 16세기 종교개혁은 신·구교 간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던 16세기말 이후 30년 전쟁을 치른 후 반성을 하는가 했으나 곧이어 철학적 검증을 받아야 하는 계몽기를 거쳐서 국가주의, 절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거치는 19세기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은 교회들이다. 그런 유럽과 미국교회 흉내를 한국은 낼 수가 없다.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한국교회는 뒤늦게 마주친 19세기 운동권의 북한식 절대주
사설
논설위원
2020.12.03 10:02
-
이미 위기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쉽게 살아가기 위하여 깃발을 내려놓은 자는 별도의 방법이 없다. 예루살렘 멸망의 날 유다 최후의 왕 시드기야가 야반도주를 하다가 느부갓네살의 부하장수에게 잡혀서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 자식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한때는 이 대목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으나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시드기야 왕의 비겁하고 비참했던 종말이 실패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분노케 하고 유다에게 영감을 주었던 하나님의 사인이
사설
논설위원
2020.11.04 14:10
-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유민주주의, 곧 노예(노비) 극복시대를 열었다?(연 지 반세기가 지났다?). 세계사의 기준으로 볼 때 유럽 기독교가 축복으로 받은 ‘자유민주주의’가 노예극복의 최선의 방식이다. 단순한 표현의 ‘민주주의’는 중국이나 북한도 자랑하는 것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차등관계를 잘 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자칫 돌이키기 어려운 함정에 빠질 수 있다.또 하나, 유럽 몰락설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지적을 보면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사설
논설위원
2020.11.04 14:09
-
숫자는 우상이다. 교인 숫자만 많다고 대수냐는 등 빈 소리들을 하는데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향해 복음의 진전을 계속해야 한다.코로나19에 위축될 필요 없다. 식이 통한다 싶으니까, 이제 교회 안 나가도 신자노릇할 수 있다고 방심하지 마라. 그래도 에 승부를 거는 신자들은 그들의 간절한 소원따라서 더 큰 은혜,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를 받는다.가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강요되었는데 그것은 본디 기독교 선교방법론의 일부였다. 가
사설
논설위원
2020.10.15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