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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처럼 전문 정치인들을 양성시키고, 연수도 시키고, 유학도 시키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양심에 불심지를 꽂아주는 등 여의도 관리를 했으면 한다. 현재 한국의 의회정치 역량을 쉽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북한과 선의의 경쟁도 하고, 남북관계가 발전해가다보면 의회활동이 많이 중요해질 것이다.여의도 정치무대를 말하면 꼭이 국회의원을 생각하는데, 의원도 좋지만 의원들의 보좌관이나 비서관들도 중요하다. 교회와 정치무대 인물들의 관계정립이 쉽지는 않겠으나 모범답안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객관적 자료를 각
사설
논설위원
2019.04.2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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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그 주변에 지체부자유한 이들을 늘 가까이하시는 유랑전도자이셨다. 어느 날 앗시시의 프란시스처럼, 리용의 피터 왈도처럼 그렇게 예수는 거리를 거니시다가 배고프고 병든 자, 특히 눈멀고 지체까지 부자유한 사람에게는 그 모습들이 안타까워서 함께 눈물 흘리시기도 하고 탄식하셨다. 저들을 불러라 저들 그냥 내버려 두면 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진다. 오병이어 방식도 서슴지 않으신 예수님을 오늘 우리는 바라본다.아직도 우리들 주변에는 응달이 많이 있다. 주거환경이 불편하고 다 늙은 몸 젊은 날의 10%의 힘도 없는 인생을 누가 알 수 있
사설
논설위원
2019.04.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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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이 지난 후 예수님이 그리운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가 만나고 싶다. 그때 십자가 지실 때 얼마나 많이 아프셨는가, 그때 홀로 항변이나 변명 없이 골고다 그 언덕 산까마귀들도 차마 서러워서 찢기고 상하신 주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할 때 그때 주여 얼마나 외로우셨나요? 이렇게 묻고 싶은 궁금증도 없지는 않았었다.이제 화려 찬란한 부활절 새벽은 또 1년을 기다려야 하고, 무덤가 막달라 그 거룩한 여인 곁에서 기다리기에도 쉽지 않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부활하시던 날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신 일이 있다. 그럼
사설
논설위원
2019.04.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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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께서 벨리알과 함께할 수 없다지 않은가. 교회가 어떻게 사단과 동업할 수 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은 “교묘한 유혹” 앞에서 자칫 혼돈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한민족이라는 틀은 있지만 인류 발전사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함께 살림을 할 수 있는가. 자칫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안겨줄 수도 있다.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교회는 “정교분리”라는 수에 매달려 비겁한 자들이 되지 말고 결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무저갱으로 뛰어들 수 없어야 한다.가난해도 좋다, 자유가 좋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
사설
논설위원
2019.04.17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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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동의하고 예수와 동행해 십자가 죽음을 지켜낸 자들의 선물이 부활이다. 죽은 뒤에 간다는 세계 이전에 “지금”, 오늘이다. 바로 오늘의 영생이 중요하다. 오늘 영생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자들의 “내일”은 그 가치를 알 수가 없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요 11:25~26)이렇게 말씀하신 예수의 육성을 우리는 오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사설
논설위원
2019.04.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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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찬가가 그럴듯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멸망의 추악한 민족사의 반성도 함께 해야 한다. 대한제국은 조선조 중기인 임진왜란 때부터 멍들고, 정묘·병자호란 때에 이르러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왕조사의 곤고함이 이어져 왔었다.우리 조선왕조는 그 출발기부터 시비에 휘말렸다. 정도전의 신민의 정치시도를 이방원과 연산군의 절대왕조의 억지 희망이 세계사의 흐름을 놓쳤고, 세종과 장영실의 르네상스 맛을 또 역사의 선물인 줄 몰랐던 안목이 부족한 우리 민족사는, 다시 1543년 대마도주가 임금에게 바친 포르투
사설
논설위원
2019.04.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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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는 매우 공격적인 단어지만 현재 한국사회만 아니라 신학 분야에서도 이따금 사용되는 단어이다. 신학 분야에서는 좌파를 자유신학 또는 자유주의신학이라 부르고, 우파를 보수신학이라 부른다. 보수신학에는 20세기 초에 있었던 근본주의를 떠올릴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교파든 자유신학과 보수신학이 공존해 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좌파는 자유적이고, 우파는 보수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후자는 전제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사상적인 측면에서
사설
라은성
2019.04.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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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경상남도에서 2명의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특히 창원 쪽 선거양상을 바라보면서 웃느라고 배꼽이 빠질 뻔 했다. 시쳇말로 여야 모두 멍청하고 정치인으로의 소명이 부족함을 느꼈다. 현 집권 여당은 초반에 여당후보를 국회의원 5석을 가진 아주 작은 정당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떤 사유가 있어서 여당이 미니 야당에게 양보한 만큼 그 결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어야 정치적 도리다. 그런데 똘똘한 야당을 만났으면 정부 여당이 후보까지 양보한 선거에 패배할 위기까지 갔었다. 겨우 504표의 신승, 아슬아슬했었다. 뒤집어졌
사설
논설위원
2019.04.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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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곡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성향을 알 수 있다. 60년대 전후로는 “대각성기 무렵” 작사 작곡의 찬송가들이 매우 친숙하게 애송되었었다. 그러던 한국교회가 1973,1974년 빌리 그레이엄과 엑스포로 74 이후로는 이상야릇한 곡과 가사들이 섞이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는 십자가, 천국, 재림, 고난, 대망 등의 가사 따위의 찬송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로 바뀌어 감을 볼 수 있다.원산과 평양, 1904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여의도 70, 80년대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다. 바로 그때부터
사설
논설위원
2019.04.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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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1운동 전후로 한 변칙 행사들을 보라. 이미 3.1운동이나 독립군 활동 등에 “색깔이 칠해졌다”, 이를 어찌 하는가? 변형 교과서, 변칙 교과서가 장차 대한민국 사람을 기형으로 만들어낼 날이 멀지 않다. 자유가 뭔지, 인간 개개인의 표현의 값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우리는 배웠다. 십자가의 죽음이 기준이다. 십자가에 목숨을 예수처럼 던질 수 없거든 예수의 그 행위만이 진리로 열리는 것임을 믿으라.한국교회는 이미 “영적 치매”에 걸려있는 것 아닐까? 아직은 치료약이 없다는 치매, 그 현상이 한국교회의 심장과 뇌에 자리잡은 것일까
사설
논설위원
2019.04.1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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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을 펴면 마리아라 하는 여인이 옥합을 깨서 주 예수의 몸에 붓는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등을 쏟아지는 눈물로 씻기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또 웃는다. 곁에서 지켜보는 가룟 유다가, 그거 2백 데나리온짜리다. 그걸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그 짓이 뭐냐? 유다의 일갈에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그때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은 다 너희 곁에 있다. 너희가 돌봐야지. 그리고 이 여인 괴롭히지 마라! 저는 나의 장례를 미리 치르고 있는 거다.예수의 이 말씀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영광의 잔칫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궁
사설
논설위원
2019.03.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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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참으로 속된 말이다.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말이기도 하다. 요즘 인심이 뒤숭숭하니까 돈푼이나 있는 자들은 외국으로 도망가겠다는 족속들이 있다.신사적인 척하면서 “우리는 세상 불타도 천국으로 가면 되니까!”라는 말을 겁없이 지껄이는 사람도 있다. 그따위 어디서 배웠냐? 세상 이 꼴 만들어 놓고 도망치듯이 오는 놈들 맞이할 천국은 없다. 천국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도 모르는가. 이 세상은 지금 사단이 상당부분
사설
논설위원
2019.03.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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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은 혁명이었소. ‘혁명’을 순진하게 리모델링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덤벼들었다가 가톨릭과 ‘30년 전쟁’(1618~1648)을 치르고 나니까, 아뿔싸! 유럽 전체가 전쟁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개혁, 절대왕정, 내 국가 세우기, 민족, 자유, 이성, 신비, 그리고 길 잃은 유럽의 가톨릭, 가톨릭보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갈 바를 잃었다. 예수가 주신 역사의 리더로서의 “지휘봉”을 잃었다.길 잃은 유럽교회 주변에서 칼 마르크스가 일어나 예수가 못다 한 인류 구원은 내가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 유럽의 사회주의, 결국
사설
논설위원
2019.03.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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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촛불운동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제발 기득권자들의 전리품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었다. 대통령 취임식 날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통령도 되겠다” 했을 때 마음의 부담을 덜고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부터 대통령 한 번 바뀌면 최소한 2천 명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었다. 이는 한국적인 현실만이 아닐 것이다. 5천만 한국인을 설득해 그들 중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 1등 득표를 해내자면 수천, 수만의 지지자 운동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헌신이 필
사설
논설위원
2019.03.1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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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은총, 용서와 속죄가 지속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1980, 5.18 광주 후유증으로 우리 사회가 난폭해졌던 때를 기억한다. 또 불확실성의 어휘, “~인 것 같다”가 판을 치기 시작했었다. 그것이 5~6년 전부터 ~같다는 불확실성 어휘가 많이 줄어들더니 2017, 광화문 촛불 이후 우리들의 어휘처리를 살피면 “~인 것 같다”가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했다.사물에 대한 표현, 자기 결정적 표현 등에서 가능한 한 표현법의 불확실성을 피해야 한다. “글쎄, 그렇군요. 나는 그때 갑작스런 사태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었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
사설
논설위원
2019.03.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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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연필을 들었다. 앞으로는 “우리는 공산당 싫어요!” 논리 가지고는 북한을 이겨낼 수 없다. 또, 북한을 우습게 아는 시건방진 생각으로도 안 된다. 공산당 싫다는 대응력으로 안 되는 것은 광화문 광장에서 김정은 칭송위원회가 활동하고, 인공기 내걸고 백두혈통 만세를 부를지도 모르는 사회상황으로 바뀌어 가는데 문 걸어 잠그고 커튼 내린다고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하는 수 없다. 실력으로 실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나 예를 들어 보자. 북한이 핵무기를 갖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어
사설
논설위원
2019.03.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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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가 이레니우스, 폴리갑, 그리고 역사가 유세비우스 자료에 그 흔적이 얼마간 남아 있다. 저자는 “요한이라고 하자!”고 합의를 하면 좋겠다. 요한복음 저자 찾기에 앞서 우리는 이사야서가 1권이냐? 1, 2, 3권이냐를 놓고 시비했는데 그보다는 한 사람 이사야일 경우, 그는 그의 활동기가 100여년이 전부였을 터인데 이사야 39장까지, 그리고 40장에서 55장까지, 또 56장 이후 마지막장까지 예언자들의 활동배경과 주변 상황이 바뀐다. 이사야 66장 전체의 기록배경은 200년 혹은 300년 정도의 기간을 쉽게 발견할 수 있
사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2019.03.06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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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기, 다시 생각해보라. 옛날이야기라고…? 그럼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의 공산당 혁명은 어떤가? 그때, 러시아정교의 교세는 러시아 인구의 99%였다. 정교러시아는 경건하고 근엄해 미사 한 번 드리는 시간이 보통 7시간 정도였다는 로마 가톨릭 사절단의 전언이 있었다.공산당 혁명이 일어나기 전 1825년 인테리겐차 러시아 혁명부터 100여 년 가까이, 짜르 니콜라이 1세와 2세 기간 동안 러시아 기독교가 한국교회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99% 기독교 믿다가 공산당 되어 망했다. 러시아 공
사설
논설위원
2019.03.0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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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3.1 만세는 한국교회의 상징성 이상의 헌신적 자세로 전국교회가 모두 참여한다는 자세로 100주년 기념은 물론 그날 1919년 3월 만세의 자세로 나라를 살려보겠다는 메시지를 만들어냈어야 한다.금번 정부가 북한 달래기, 북한과 공생관계를 서두르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북 분단 이후 한국교회는 민족의 화해나 이산가족 상봉, 더 나아가서 남북한을 오고가면서 이산가족들이 상호 방문하는 것을 좀 더 일찍 실현할 수 도 있었다. 국군포로나 전쟁 중 사망자들 유해 모셔오고 가기 등, 인간의 근본을 해결하는 일, 좀 더 앞서
사설
논설위원
2019.03.0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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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만세운동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금년도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하긴 1919년도 말부터 일본제국대학에서 배운 자들과 러시아 공산혁명 정신에 세뇌된 자들이 잠시 뛰어들었다가 이데올로거들이 떠난 일이 있었다.3.1정신은 깜박 방심했다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3.1정신은 북한과 같은 폐쇄집단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순수운동이었다. 당시 세계인구 80%가 식민지 노예생활이었을 때 대한민국 정신은 온 세계 지배국들을 참으로
사설
논설위원
2019.03.06 19:03